『예루살렘아 즐거워하라. 너를 사랑하는 이는 다 모여오라』 이렇게 오늘 미사 경문 「초입경」에 적혀 있으며 오늘은 기쁨의 주일로서 교회의 뜻대로 우리는 기뻐해야겠읍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기쁨의 원천을 찾을 수 있고 교회 안에서 천주의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보다 더 부드러울 것이며 우리를 위로하기 위하여 모성적 사랑이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마치 제 어머니가 위로해 주는 사람처럼 그렇게 위로하겠노니 너희는 예루살렘 안에서 위로를 누리리라』(이사야 66.13)
우리는 얼마나 이 위로가 필요하고 또 위안을 바라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읍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고통이 있고 사방에서 비참한 관경은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에 이러한 고통이 없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은 행복된 시간이겠으며 우리의 생활은 순조로운 것이라 할 수 있겠읍니까? 교회는 오늘 다같이 모여서 우울한 생각을 버리고 기쁨의 즐거움을 갖도록 우리에게 권하고 있읍니다. 여러분은 좀 이상한 감을 느낄 것입니다. 이 봉재시기에 교회는 좀 더 우리의 슬픔을 가하게 하고 우리의 죄를 더 뉘우치게 하고 또 그리스도의 수난에 좀 더 친밀히 참여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읍니까? 확실히 그래야 옳읍니다. 그러나 부활을 앞두고 우리에게 참된 기쁨을 갖도록 권유하는 교회의 정신도 결코 그릇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참된 기쁨이란 무엇인가 알아봐야 하겠읍니다. 『기쁨을 아는 백성은 행복하도다』(성영 88.16)
기쁨이란 생활의 감정입니다. 여러 가지 기쁨으로부터 정신생활에서 오는 깊은 즐거움이 있응니 즉 사랑의 기쁨, 앎(認識)의 기쁨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고귀한 기쁨은 노력과 희생을 필요로하며 그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은 보다 인간적이고 우리를 천주와 비슷하게 만드는 기쁨이니 즉 진리를 소유하는 지식의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에는 제한이 있고 또 필연적으로 그의 말로(末路)인 죽음이라는 것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주는 데에 참된 즐거움이 있읍니다. 생명의 가장 고귀한 표시는 자기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개인주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 있으며 이 사랑은 바로 주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버려서라도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이 바로 이 사랑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제한이 있을 수 없으니 대저 그들은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으며 가장 위대한 사랑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왕 15.13)
교회는 기쁨을 찾으려 헤매이는 사람들에게 참된 즐거움을 약속할 것이며 참된 기쁨은 영원한 기쁨인 천주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외칠 것입니다. 그는 또한 고통 속에서 지내는 생활은 참된 기쁨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외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는 참된 기쁨의 소유자를 다음과 같이 부르시지 않았읍니까? 『가난한 이는 진복자로다. 우는 이는 진복자로다. 박해로 고통을 받는 이는 진복자로다』 현재 그들이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장차 그들은 위안을 받을 것이고 또 천국이 저들의 것이 되기 때문에 그들은 참된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오늘 성경에 나오는 떡의 영적으로 상징된 성체 성사에 요약됩니다. 흔히 많은 신자들은 기쁨의 성사인 이 성체성사를 하나의 의무적인 것으로만 보는 수가 많읍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함으로 우리는 바로 천주를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우리는 영성체로써 우리를 천주께 드리며 우리를 위해서 당신 몸을 바친 그리스도의 수난에 일치해야 하겠읍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애덕으로 우리 형제들 사이를 더욱 굳게해야 하겠읍니다. 우리가 서로 이 사랑 안에 일치할 때에 우리는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기쁨이며 복음은 사랑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행복을 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의 계명을 더 충실히 더 실천적으로 지켜야 하겠읍니다.
『기쁨을 아는 백성은 행복하도다』 아멘
兪在國 神父(부산 서면 보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