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기까지 (19) 再會(재회) ②
발행일1963-03-24 [제368호, 4면]
미남이는 말이 막혔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니 친근한 말이 나올리 없다.
『엄마!』 하며 수화기를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여보세요… 글쎄 미남이가 그만 질려서 전화통을 나를 주어요』
수련이의 음성은 한댓살 젊게 들렸다.
『엄마! 정말 우리 아버지야』
미남이는 이렇게 따졌다. 아마 하도 뜻밖에 전화통으로 아버지를 만나고 보니 실감이 나지를 않는가보다.
『글쎄, 미남이가 정말 아버지냐고 묻는군요.』
수련이는 전화통에다가 입을 바짝 대고 명랑하게 웃었다.
『미남아 어서 한 번 더 아버지! 하고 불러바. 그래야 아버지가 얼른 온다.』
옆에서 듣고 있던 오명철이가 미남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싫어』
미남이는 불만을 털어놓았다.
『글쎄 미남이가 아버지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만이 대단해요』
수련이는 첩첩히 쌓였던 그리운 정을 미남이를 빗대놓고 흠씬 풀고 있다.
『미남이 어머님! 전화가 곧 끊깁니다. 어서 남은 말씀 마저 하세요』
오명철이가 일러 주었다.
『여보세요. 얼른 서울로 오세요 네. 전화가지군 안 되요! 첫째 미남이가 불만인걸요…』
아마 박영진이가 서울로 오기로 약속이 되었는지 수련이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싣고
『그럼 그렇게 알고 기다리겠어요. 네…네… 알았어요 그럼 안녕!』
수련이는 수화기를 오명철에게 주고 나서는 마치 꿈이나 꾸는듯이 멍하니 앉았다.
『엄마! 아버지 언제 서울로 와』
미남이가 덜컥 안겼다.
『인제 일 끝나는대로 곧 오신댔어』
『아버지 서울 오면 나두 서울로 와야지.』
『그럼-』
『할머니두-』
『글쎄 할머니는 안양에 그냥 계실거야』
『그럼 나두 안양에 있을래』
『아버지하고 안 살구?』
『아버지두 좋지만 할머니두 좋은걸…』
『엄마는 안 좋고!』
『엄마는 진짜 더 좋구』
『호…호… 우리 미남인 사내니까 아버지를 더 좋아해야해』
『아버지가 나 좋다구 할까?』
『그럼 아버지가 얼마나 미남일 이뻐하시게…』
『시… 거짓말. 이쁘면 벌써 왔게』 미남이는 마음이 가라앉자 차차 하는 소리가 비판적이다. 수련이는 오명철이 듣는데 미남이가 너무 마구 떠든다고 생각했다.
『자… 그럼 우린 가자…』
『아니 차라두 한 잔 드시고 가시죠』
『아! 아닙니다. 이냥 가겠읍니다』
수련이는 곧 미남이의 손목을 잡고 일어섰다. 수련이의 태도는 차차 안명철이를 깔보는 경향을 나타냈다.
(네가 아무리 거드름을 펴도 기껏해야 미남이 아버지의 고용인에 지나지 않지)
하는 저의가 풍기고 있다.
『그럼 내일부터 어디로 연락을 할까요』
오명철이가 물었다.
『글쎄요 내일이라도 곧 집을 얻겠어요. 집을 정하면 알려드리겠어요』
수련이는 일부러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박영진의 부인다운 품위를 지어본 것이다.
「호텔」에서 나온 수련이는 흐뭇했다. 무한 기뻣다. 남편의 다정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있다.
『인제부터는 당신과 미남이에게 그간 고생시킨 보속을 하리다. 아무 걱정 말고 다시 만나요』
옆에 오명철이가 듣고있지 않았더면
『여보!』
소리를 치고 한바탕 울었을 것이다. 체면이 무엇인지 그것을 꿀꺽 참고 있다가 거리로 나서니 어느덧 밤은 깊었었다.
『어디로 갈가…』
영천에 방이 있기는 하나 그곳으로 미남이를 데리고 가기는 정말 싫었다. 순옥이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이다. 미남이 앞에서 주책 없이 「빠」에서 하던 그대로 까불면 미남이는 놀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명철이도 영천에서 살지 말라는 충고를 하지 않았는가.
『엄마. 집 어디 있어… 나 졸려 어서 가서 자웅』
미남는 하품을 한다.
『어디로 갈까』
수련이는 명동 뒷길로 돌아들며 한창 망서렸다.
숫제 여관에서 잘까. 그것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아는 여관도 없고…』
수련이는 미도파 백화점쪽으로 나가려하다가 발길을 돌려 명동언덕을 잡아들었다.
성모병원의 유리창이 환했다.
육층에는 아직도 진영이가 누워있으리라.
까딱하였더면 진영이의 꼬임에 빠져 구렁텅이에 빠질번한 일을 생각하니 새삼 몸서리가 났다.
정말 큰일날 번했어… 누구에게나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것은 수련만이 아니라 누구가 이런 뜻밖의 행운을 얻을 때는 아무나 잡고 아무나 얼싸안고 행운을 나누고 싶어지는 것이다.
『엄마! 저 집은 유리창 뿐야』
미남이가 물었다.
『병원이야! 천주교에서 꾸민 병원야 참! 미남아 우리 성모님께 고맙습니다고 인사드리고 갈까』
수련이는 불현듯이 성모마리아를 모신 동굴 앞으로 다가섰다. 미남이는 벌써 달려들어 성호를 긋고 장궤를 한다. 수련이는 아직 아무 격식도 모른다. 미남이가 하는 것을 보고 그 옆에 한 무릎을 꺾고 고개를 숙였다.
『엄마! 엄마두 어서 교리책 자꾸 읽어. 그래야 영세 한대』
미남이는 제법 선배다운 소리를 했다. 수련이는 눈을 감고 빌었다.
『아뢰옵니다. 교리 공부를 성실히 하고, 곧 영세를 하겠읍니다. 입교하는 날부터 한편생 성모님을 받들어 천주님을 뫼시오리다』
수련이 생각에는 이번 일이 잘된 것은 모두가 자기가 묵주를 지니고 있던 덕분 같았다. 더우기 안명철의 오해가 손쉽게 풀린 것은 오로지 묵주를 지녔던 덕분이다. 무슨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다.
만일에 안명철의 오해가 쉽사리 풀리지 않았더면 지금 이런 행운은 아직도 먼 곳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련이는 고개를 수기고 무릎을 꾼채 마냥 그대루 있고 싶다.
『이애 수련아』
소리가 났다. 부르는 사람은 순옥이다.
『너 여기서 뭣하고 있니』
다가서는 순옥이는 또 물었다. 그러나 수련이는 아직도 눈을 감고 있다.
『이애 진영이가 대단해. 벼란간 열이 오르구.』
수련이는 여전히 대답이 없다. 옆에서 보던 미남이가 보기에 안돼서 어머니를 가벼이 흔들며
『어머니! 누가 왔어』
나직한 음성이다.
『순옥아! 이 애가 내 아들이야.』
수련이는 진영이 이야기는 묵살하고 그 대신 미남이를 소개했다. 눈치 빠른 순옥이는 미남이가 있어서 술집 이야기나 술파는 동무의 일은 일체 덮어두려는 수련이의 심정을 알아채렸다.
『아이 이뻐라!』
순옥이는 미남이를 덥썩 안았다. 미남이는 어째야 좋을지 몰라 안긴채 엄마 눈치만 보았다.
『미남아 아주머니야』
수련이는 미남이의 굳어진 표정에 미소를 던졌다.
『그래 일은 다 잘됐니』
순옥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런 부류의 직업 여성에게는 행을 바라는 언덕거리가 드물다. 그래서 행운과는 아예 외면을 하고 지낸다. 수련이에겐들 무슨 달가운 행운이 찾아오랴-싶어서 그렇게 묻는 것이다.
『잘 됐어. 내 나중 이야기할께…』
수련이의 음성은 은근했다.
『이애 그럼 더 늦기 전에 어서 집으로 가자!』
순옥이가 재촉을 했다. 수련이도 순옥이가 알심있게 미남이를 다루는 것을 보고 겨우 안심이 되어서 일단 영천으로 가기로 했다.
영천집에 돌아간 수련이는 곧 미남이를 자리에 눕히고 혼자 앉아서 「홍콩」으로 보낼 편지를 썼다. 전화로 다하지 못한 사연을 적자는 것이다.
밤은 벌써 자정이 넘었다. 잠이 오지를 않는다. 수련이는 안양성당에서 구해온 교리문답을 꺼내들었다. 한장 두장 읽어가는 뒤에 미남이 숨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돌아다 보니, 미남이는 어느 틈에 일어나 앉아서 등 너머로 교리책을 같이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