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47) 아제크렘의 산상에서 ①
발행일1962-09-02 [제341호, 4면]
「타만라셋트」에서 「아제크레므」까지 올라가려면 도보로 혹은 나귀를 타고 3·4일의 여행이 필요하다. 물론 길다운 길은 전연 없다. 길이라고는 다만 여기 저기서 드문 드문 찾아볼 수 있는 발자욱이라든가 혹은 캠프를 한 흔적 같은 것으로 알아보는 수밖에 없다.
가는 곳마다 흑색과 녹색 청색과 적색 등의 돌로 깔려있다. 그러나 그 돌들은 항상 어두운 빛이다. 여기저기 약간의 관목 이곳 저곳에 풀잎이 펴졌으며 때때로 푸석흙에 평행하여 여러가지 밝고 선명한 빛의 작은 꽃들이 몰려있다. 이것이 「투아레그」인들의 자연이 요색인 「구레이아」인 것이다.
길이 끊어진 곳에서부터 「아제그레므」 똑바로 가깝게 가기 위해서는 언덕을 넘어서 백미터 이상의 높이의 무시무시한 단애를 올라가지 않으면 안된다. 맨 꼭대기는 거의 평평하며 노출되어 있어서 다만 거대한 녹생돌이 깔려 있을 뿐이다. 직경 3백미터나 되는 이 거대한 테불위에는 산간의 바위에서만 나는 지극히 작은 식물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맨 꼭대기는 2천7백미터의 높이가 되며 그곳은 항상 센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 주위는 전망이 좋고 넓고 시원스럽게 뚫여 있다. 눈에 보이는 「호가아르」의 모든 봉우리가 하늘을 향하여 환상적인 덩어리가 되어 높이 솟아있다.
「아제코레므」와 나란히 서면 「타만라셋트」도 거의 평범한 전망이 된다. 프랑스에서 돌아와서 전에 살던 은둔소에서 약2개월을 지내고 신부는 7월 1일 「아제크레므」로 출발했다.
『거의 모양이 다른 여러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또 이 지방의 산악지대의 매듭인 산꼭대기에서 나는 완전히 고독합니다. 그 전망은 멋이 있으며 한눈으로 끝없이 광대한 사막지대에까지 불과 남으로 향하여 내려가고 있는 신덩어리를 볼 수가 있읍니다. 가까운 곳에는 산봉우리마다 바늘과 같이 뾰죽뾰죽 솟은 바위와 겹겹히 쌓여져 있는 기묘한 모양의 바위 등이 이상하게 읽혀진 모습을 바라볼 수가 있읍니다.』라고 그는 편지에 썼다.
『그것은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고독입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비가 오기만 하면 즉 향기로운 풀로 덥혀진 많은 낮은 땅이 있읍니다. 그러면 즉시 「투아레그」인들이 좋은 젖을 먹기위하여 그곳에 텐트를 치는 것입니다.』
신부는 뭇사의 비서인 바 함무우와 함께 그곳에서 몇달을 보냈다. 신부는 이 사나이가 상당히 횡령쇠나 범하고 있지나 않는지 혹은 「세느시스」 교단의 선전을 비밀히 맡고 있는 분자나 아닐까 하고 의심했으나 이 사나이의 지성과 교양은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바 함무우는 민속학과 언어학에는 뛰어난 협력자였다. 바 함무우는 신부와 같은 줄기차고 강한 연구가를 만났기 때문에 일을 태만이 할 수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고원에서는 일상생활도 조용하게 지나게 되었으나 쉴새 없이 혹은 때때로 회오리바람과 같은 심한 바람이 불어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장 곤란한 것은 나무 등을 운반할 때에 절벽을 올라가고 내려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항상 그 근처로 오는 「다그 라리」족의 방문을 제외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방문은 드물었다. 샤르르 수사는 그가 몇번이나 그의 솔직함과 근면한 성격을 칭찬하고 있는 이 『배신(배臣) 부족」에 대하여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이 은수자와 친하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화제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천주의 계명에 대한 것과 또한 병이라든가 목초지의 상태와 가정이야기 등이 화제에 올랐던 것이다. 신부는 때때로 「투아레그」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프랑스군 당국과의 알륵의 중개자의 역할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체재중에 그들은 프랑스의 한 기병오장이 물이 보금을 방해하기 위하여 두필의 낙타를 죽여버린 것 또 그가 「아메노칼」의 근친의 소녀를 능욕한 것을 한탄하고 있다.
그럴때마다 그는 사관들에게 교섭하러 가서 「투아레그」인들을 위하여 정의를 요구했던 것이다. 오아시스 지방의 사령부가 그 대표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세심면밀하게 해달라고 몇번이나 요청했다.
방문자중에 가장 빈번하게 찾아오는 사람은 우스켐 아그 시캇트라고 하는 22세의 젊은 「다그라리」족이었다. 이 사나이는 「아제크레므」를 올라올 때마다 샤르르 수사에게 물과 나무를 갖다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극히 세심한 정성을 다해서 돌보아 주었다.
12월에는 겨울이 돌아오는데도 불구하고 신부는 이 산간의 은둔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살 수 있는대로 자기의 사전편찬의 일을 하기 위하여 그곳에 머물러 있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감기가 들어서 열이 나는 듯하였다. 그래도 그는 홀로 일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바 함무우는 이집에 완전히 멀미가 났던 것이다. 그는 항상 비명을 올리고 있었다. 밤에는 얼음같이 차고 바람은 지동치듯 불어오며 식량은 작고 밀가루 · 커피 · 사탕 · 그리고 야자열매 등이 식량의 거의 전부였다. 12월 중순경 신부는 바 함무우의 강력한 소원을 따라서 「타만라셋트」로 돌아갔다. 그는 「타만라셋트」에서 참을만한 날씨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식량사정은 순조롭게 되지 않았다. 2개월 동안 하루도 다짐없이 가물었으므로 식물의 저장이 떨어져서 가격이 몹시 비쌌다.
이때 뭇사는 즉시 「티디켈트」의 낙타기병 등의 식량으로 보리와 밀을 보급하도록 약속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예정대로 보급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뭇사는 은수자에게 자기를 위해서 중재를 청했다. 신부는 즉시 조정을 하기위해서 샤르레 대위에게 편지를 썼다. 확실히 뭇사도 거의 수확을 감시하지 않았다. 즉 그는 관계에 의하여 미리 농민들에게 밀의 가격을 지불했으나 그 보급에는 힘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아드라아르」에서 낮잠을 자고 젖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확은 실제에 있어서도 대단히 적었으며 양들은 굶주려 있고 뻐터의 생산은 전연 없었다. 신부의 중재로 「투아레그」인들은 풍년이 돌아올 때까지 연기할 것을 허락받게 되었다.
신부는 뭇사가 또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나머지 자칫하면 사치에 떨어지기 쉬운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메노_(뭇사)은 그에게 기식하는 사람들에게 휘감겨서 변제할 수도 없을만큼 부채를 져서 그것이 「투아레그」인들에게 중세(重稅)를 지워주는 것도 생각지 않고 함부로 쉴새없이 대접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또다시 뭇사가 그에게 의논하러 왔을 때 신부보다 현명한 방법으로 더욱이 신자(마호멛트교도지만)다운 처세법으로 생활하도록 그에게 권고했다. 왜냐하면 외관적으로는 물질적인 것만 문제가 되지 않는 때에도 신부가 부르짖는 것은 항상 종교적인 영혼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주의 사람인 신부는 그 궁극의 목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본질적인 계명에 인도하는 것 밖에는 생각지 않았다. 즉 그것은 천주와 남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선 제일의 의무는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을 초월하며 천주를 사랑할 것이다. 제2로는 모든 사람을 자기와 같이 사랑할 것이다. 자기 자신과 같이 남을 사랑하는데서 동포애 평등(이므랏드) 자유(노예들)의 네가지 법측이 유래한다. 「아담이 굉이를 사용하며 에봐가 베틀에서 베를 짜고 있을 때 어느 곳에 귀족이 있었으며 어느 곳에 「아므릿드」가 있고 어느 곳에 노예가 있었다고 하는 것일까?)』라고 그는 뭇사에게 반복해서 말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그가 뭇사와 회담하기 위하여서 그리고 조금도 누설되지 않기 위해서 만든 노오트에서 볼 수가 있다. 그는 뭇사를 가까운 실제의 현실로 인도했다. 현실에서는 귀족들은 「이므랏드」를 (단수로는 아무릿드) 혹은 신하들을 몹시 싫어하고 있다.
그러나 귀족들과 신하들은 노예를 경멸하며 예속시키는데 관해서는 일치하고 있으며 노예들은 그들이 가련한 생활조건에 의하여 의기를 상실하고 있다.
신부는 노예 제도를 폐지할 권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기회있는 대로 이와같은 제로를 문허뜨리려고 노력하며 아베노칼이 노예를 감시하도록 재촉했다.
뭇사는 신부의 말을 경건하게 들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지 않기 위해서는 너무나 품이 있고 자유로운 이간이었다. 즉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평등 그것은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투아레그」인들도 항상 프랑스인들의 신하일 것일가? 뭇사는 똑바로 문제를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