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 타신 임금 개선 하신다』
싸움에 이겨 보무당당하게 개선하는 나폴레옹 같은 처지도 아닌데 그 무엇을 지지하고 그 무엇을 반대하는 「데모」대가 벌려놓은 수라장도 아닌데 조용조용히 그런대로 온 도성이 뒤끓고 있읍니다. 예수님이 초라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려 하기 때문입니다.
순박하고 온순한 백성들의 마음이 사무쳐 깨닫는 바가 있어 길가에 튀어 나왔읍니다. 요즘같이 동장을 통하여 반장을 시켜 몰려온 사람들이 아니었읍니다. 사무쳐 느껴 「오리와」 가지와 「빨마」 가지를 손에 들고 깃발처럼 밀려왔읍니다. 사무쳐 느껴 제 의복을 길에 깔았읍니다.
그 누구가 못참는 소리로 「호산나」를 외쳤읍니다. 이것은 감격스러운 장면이었읍니다. 『다위 자손은 만세 무강하소서 주의 이름으로오신 자 찬송을 받아지이다』 예수님은 왜 그토록 세상 영광을 피하시며 숨어살아 계셨는데 여기에서는 한몸에 영광을 입으셨읍니까. 번연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줄 밝히 알으시나 오늘만을 결심하신듯 그 영광받으시기를 거절치 않으시는데는 뜻이 계셨읍니다. 그 뜻은 천주 성부의 것이고 그 뜻은 지엄하야 순명 아니고서는 이룰 길이 없으시매 수난문턱에서 잠시의 영광을 누리셨읍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에는 세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읍니다. 첫째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겸손과 온유를 보이기 위함이고, 셋째는 최후의 때가 박두하였으니 당신이 왕이신 메시아를 선언하시기 위함이었읍니다. 짜여진 예언의 순서대로 예수님의 행동은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천주의 아들로서 어김 없이 이행하십니다. 자가리아의 예언은 이러합니다.
『보라 너희 왕이 너희들께 오신다. 그는 의로운 자, 구속자, 겸손한 자니라』
여기 메시아는 세속적 무사나 정복자와 같이 의기양양하게 거동하시지 않고 한 마리 나귀를 몰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렇게 장한 차림의 모십이 아닌데도 온 도성이 소용돌이 치고 있읍니다. 이미 본바 허다한 영적을 생각하여 백성들은 참으로 기뻤읍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천주를 찬송해야 할 것을 잊지 않았읍니다. 『호산나!』 『호산나!』 목이 매여지게 부르짖는 환호성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음이 오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질투하는 「바리서이」들, 눈꼴이 사나운 가저백성을 꾸짖어 입을 막게하라 하는 것을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이 반드시 소리하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라해서 한 짓이 아니기에 만류시킬 것도 아니라 해두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이들은 천주를 죽이고 파멸에 이를 것을 미리 아시는 예수님은 울으셨다고 루가 복음은 말했읍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영광 앞에 철없는 백성의 함성을 생각할 것이면 다시금 생각케 하는 나귀 타신 임금의 모습이 처량합니다.
오늘 주일 예전에는 성지축성과 거동이 있고 미사가 연이어 바쳐집니다.
첫째 부분은 영화들 노래하고 둘째 부분은 예수 수난을 슬퍼합니다. 「빨마」나무는 어둠의 왕 마귀를 이겨 승리하셨음을 상징하고 「오리와」 나무가지는 천주와 화목하고 성총을 얻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사제는 성수와 향을 뿌려 축성합니다.
이를 사제의 손에서 받아들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을 기념합니다. 이 때야말로 그 당시의 현장이오 「갈릴래야」로부터 온 순례단의 심정으로 감격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늘의 개선은 수난문턱에로 이르는 길목이 되고 있읍니다. 이것을 백성들이 모릅니다. 그가 참다운 메시아이신줄만 압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그들의 메시아이신 것만을 알려주실 뿐입니다. 이것만으로 일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던져준 겉옷이 예수님을 알몸으로 벗기고 그들이 던져준 나무가지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 것을 생각하면 가엾은 임금을 백성들이 죽인 죄인들 올시다. 아시는 자와 모르는 자, 근심하는 예수님과 찬송하는 백성, 여기에 하늘과 땅이 있읍니다. 부분적인 사람과 전체적인 천주 상간에 소리 있으니, 주여 우리들 도우소서 합니다.
죽은 앉은뱅이를 앉은뱅이로는 부활시키지 않으실 예수님의 권능은 종을 다스리는 주인같지 않습니다. 모든 이가 사무쳐 깨달아 나무가지를 던집니다. 옷을 벗어 길가에 깔았읍니다. 나귀 타신 임금이 개선하십니다.
鄭淳在 神父(大邱主敎座 補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