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共産主義問答式解說((공산주의문답식해설)] (36)
발행일1962-09-09 [제342호, 2면]
共産主義 歷史 - 레닌부터 흐르시초프까지 ②
【문252】 미래 역사를 암시하고 또 폭력에 의한 소련 독재를 암시한 이 제2차 대회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
【답】 이 대회에서 오랜 토의 결과 레닌의 계획이 선택되었는데 그 중에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초래할 수 있는 무산계급의 독재를 최후 목적으로 하는 안(案)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여러가지 사회개혁을 통해서 러시아사회민주당이 인민대중을 포섭할 수 있고 또 이 대중을 맹목적으로 폭력혁명에 가담시키게 할 수 있었다. 이 계획이 오늘날까지 공산주의의 불변하는 책략으로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또 이 제2차대회에서 「볼쉐빅」과 「멘쇠빅」이란 용어가 생겼는데 전자는 레닌과 그 추종자들을 일컬어 한 말인데 그 뜻은 이 대회에서의 다수파를 가르킨다. 「멘쇠빅」이란 용어는 레닌의 반대자들을 일컬어 뜻한 말인데 그 뜻은 이 대회에서 소수파를 가르킨다.
【문253】 레닌의 계획을 채택한 직후 어떻게 되었나?
【답】 제2차 대회가 끝나자 『이스끄라』 신문을 「멘쇠빅」파들이 압수해버렸다. 그러나 레닌은 또 다른 신문을 발간하려고 했다. 그는 여러가지 저서 가운데 유명한 책 『일보전진 이보후퇴』를 1904년 5월에 발행했다. 이 책은 「훈련된 혁명당」의 줄거리를 추려놓은 것인데 레닌은 나중에 이 당을 결성하여 노동자들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봉사하며 그들의 독재를 위한 폭력혁명 투쟁에 노동자들을 동원시켜야만 되었다.
【문254】 어떻게 레닌이 이와같은 견해로 몇몇분자가 국민대중을 탄압하는 소련독재의 길을 닦았으며 나아가서 스탈린과 흐루시초프의 전성기를 마련했는가?
【답】 레닌의 견해는 결국에 가서 한가지 전제를 말하는데 그것은 공산당이 소수파로 머물면서 지배력을 갖고서 독재를 할 수 있는 당이 되어 이 소수당파는 침투작전으로 대중의 사상과 행봉을 조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조직 원칙을 세워 소수파가 사기와 폭력으로 권력을 잡게되면 소위 민주중심주의의 엄밀한 규율로서 좌우 된다고 했다. 그러나 실은 이 민주중심주의란 것은 공산당 지도자가 제 마음대로 하는 규율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파가 결국 철저한 독재로 발전해 나가는데 오늘날 소련이 그러하며 나아가 세계 정복을 하려는 것이다.
【문255】 어떤 기회에 레닌이 처음으로 자기계획을 실현하게 되었는가?
【답】 레닌이 자기 계획을 실천한 기회는 1905년 러시아혁명이었고 짜리리스트 러시아 왕국이 일본에 패전당한 후이다.
이 혁명은 자발적인 국민의 봉기였는데 이것이 진압된 것은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의회정치를 세우자는 두마의 요구에 짜르 황제가 동의하는 협상으로 성립된 것이다.
【문256】 1905년 혁명을 둘러싸고 멘쇠빅스와 레닌추종자들 사이에 어떤 알력이 있었는가?
【답】 맑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멘쇠빅스와 레닌 양파가 독재를 하기위해서는 유산계급의 민주주의적 혁명이 무산계급의 혁명보다 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멘쇠빅스파는 사회민주당이 짜르왕조를 반대하는 유산계급혁명운동에 봉사해야하며 노동자들의 즉각적 권리를 반대하는 듀마(DUMA) 계약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플레카노브의 견해와 비슷했다. 플레카노브는 무산계급혁명을 실현시킬려면 먼저 혁명이 상당히 오랜 기간을 두고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점에 있어 레닌과 플레카노브는 의견 차이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공산당은 플레카노브의 초기 저서를 권위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레닌은 자본주의의 현 단계를 고려할 때 유산계급이 주동되는 민주혁명만이 가능하다는 멘쇠빅스파들의 주장에 동의했으나 레닌의 고집은 러시아에 있어서는 무산계급이 혁명의 선봉이 되어야 하고 무산계급과 농민들을 위한 혁명적 민주독재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혁명의 여러과정을 겪고난 다음 무산계급의 독재로 옮겨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257】 멘쇠빅스와 레닌파 사이에 갈등 이외에 1905년 러시아 사회민주당 내 다른 제삼 세력이 있었는가?
【답】 있었다. 레온 트랏스키의 견해가 그것이다. 『영구한 혁명』이란 책을 쓴다음 고안해낸 설인데 이에 의하면 유산계급 혁명은 맑스의 역사관을 맞추어 나가기에 너무 때가 늦었다. 따라서 무산계급이 혁명과업을 당장 실천할 책임을 가진다. 또한 무산계급혁명 완수는 농민들의 지지에 달린 것이 아니고 다른 여러나라의 무산계급의 협력을 받아서 이루어진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