洗足禮(세족례)의 典禮的(전례적) 起源(기원)
발행일1963-04-07 [제369호, 4면]
세계 역사 가운데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과 관계 있는 사건이 전개된 주간(週間)이 있다.
이 주간에 어떤 사람들로부터는 사랑을 받았고 또 어떤 사람들로부터는 미움을 받았던 한 사람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삼일날에 부활하였다.
어느 때든지 사람들은 죽는다. 부활날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한 사람이 다시는 죽지 않기 위해 부활하였다. 그를 예수라 부른다. 예수 부활날 새 세계가 시작한다.
왜?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이에게 지금은 죄의 용서와 천주와의 우정을 그리고 장래에 부활의 확실성을 갖다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부터 해마다 신자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살으신 이 마지막 주간을 기념한다.
부활이 앞서는 이 주간은 예수께서 개선용사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간이요 성체성사를 세우신 주간이요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묻히신 주간이다. 이 주간을 성주간이라 부른다. 이 주간에 거룩하신 예수가 사람들에게 모든 성성의 원천을 열으신 때문이다.
해마다 성주간의 예절을 우리는 첫 성주간에 되살게 한다. 그 예절은 주님의 언행에 우리를 현존케한다. 그는 우리를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통하게 한다. 성주간의 예절은 우리를 교회와 함께 구원의 위대한 신비에 살게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성주간 예절 가운데 사목적 가치가 큰 「세족례」가 있다. 어지러운 세태에 백번 애국을 절규하는 이보다 남의 발을 씻어줄줄 아는 사람이 아쉽다. 세족례의 전례적 기원을 살펴보기로 한다.
예수께서 최후 만찬시 『너희게 새로운 계명을 주노니 곧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 마치 내가 너희를 사랑함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할지니라. 너희가 만일 서로 사랑하면 모든이가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되는 줄을 알지니라』 그러나 이 계명을 주시기 전에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었다. 『내가 너희게 표양을 주어써 내가 너희게 행함과 같이 너희도 이같이 행하기를 위함이로다』 행동이 말보다 앞선다. 표양이 계명보다 앞선다. 세족례는 애덕의 신비에 우리를 이끈다.
초대 그리스도 신자들과 특히 수도자들은 전대의 의의를 존중시 하였을 뿐 아니라 자연적으로 그를 실천에 옮겼다. 아브라함이 「맘브레」의 세 사람에게 한 것처럼(창세기 18-4 43-24 루가 7-44 띠모테오전 5-10) 먼지 속을 걸어온 여행자에게 먼저 발을 씻기 위해 물을 주거나 혹 모르는 걸인일지라도 그의 발을 씻어주었다. 사막의 교부 시대부터 평화의 친구 공동기구 그리고 성서낭독 등을 포함하는 손님접대 예절서 가운데 세족례를 볼 수 있다.
찰스 대왕 시대에도 수도회의 사회적 존재가 증가함에 따라 접대의 복음적 의의가 평가되었다. 한편 고대 수도원에서 주간 봉사를 담당한 자가 성 목요일의 세족례의 뜻에서 오는 겸손의 행동으로 매 토요일 수사들의 발을 씻었다. 그리하여 세족례는 차차 단순한 상징적인 예식이 되었다.
「똘레도」의 제17회 주교회의(694년) 때 처음으로 나온 주교 전례서에 발견된 성목요일의 세족례가 찰스대왕 시대에 수도원에서와 같이 두 가지 구별된 예식 즉 성직자와 가난한 이를 위한 세족례가 주교좌 대성당에서 보편화된 것을 증명한다. 그 후 가난한 이를 위한 세족례가 중세기 말부터 존속하게 되었다. 10세기 말 이전에 로마에서 세족례를 실시한 흔적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성방지거회는 벌써 10-11세기부터 전해온 세족과 세계명에 관한 복음기사(요왕13-30)를 채택하였다.
그 요왕복음에 「몬떼까씨노」와 중부 이태리에서 내려온 「우비 까리따스」를 합쳤다. 「우비 까라따스」는 세족례에 대한 로마 전례에 새로운 계명 즉 형제애의 특징을 주는데 기여하는바 크다. 1600년의 「주교예식서」는 그 뜻으로 주교가 가난한 자를 선택하여 세족하도록 마련되어있다. 개정된 교회역서(曆書)도 이날 애덕의 업적을 이행하기를 강조하고 그날 복음 낭독 다음에 세족례를 하도록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