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召(성소)] ⑩ 꼰벤뚜알 성방지거회 (O. F. M. CONV.)
2仁祖(인조)가 萬邦(만방)에
大邱(대구) · 釜山(부산)서 布敎中(포교중)
발행일1962-09-09 [제342호, 3면]
복음을 문자 그대로 준수하는 아씨시 의 성방지거의 『규율과 생활』이 호노리오 3세 교황으로부터 1209년에 구두로 1223년에 서면으로 윤허되었다.
이 교황이 주신 규칙 아래 꼰벤뚜알 작은 형제들은 「아씨시」에 있는 성방지거의 무덤과 「빠두아」에 있는 성안또니의 무덤을 지키는 자로서 7세기에 이르도록 존재하고 있다.
처음에 이 형제들은 가는 곳마다 수도원과 성당을 건립하였다.
그래서 교황께서 「꼰벤뚜알」이란 이름을 주셨다. 그 이름이 작은 형제 자체를 가르치게 되었다. 여기서 오늘 소위 「작은 형제회」라 물리는 둘째 수족(修族)이 생겨 「옵셀반떼스」라고도 하여 네오 10세 교황으로부터 1517년 동 회칙이 윤허되었다.
또한 「까뿍친」이라고 불리는 셋째 수족도 있어 1528년에 그 회칙이 수여되었다.
불란서 혁명 후에 방지거 수도회의 본시 회색 수도복은 흑색으로 「까뿍친」은 밤색으로 작은형제 「옵셀반떼스」는 갈색으로 변경되었다.
1208년 방지거가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사람들에게 평화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고하면서 둘씩 둘씩 온 세계를 가라』고 하면서 당신 여덟 제자들을 사방에 보냈다. 교회 역사는 개선과 퇴보와 순교자와 성인과 설교가와 선교사와 학자와 예술가와 사회개혁자들의 방지거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동 수도회는 흑사병 프로테스탄트 혁명 전쟁 동란 박해 억압을 당하였다. 그러나 「꼰벤뚜알」 성방지거회는 이 모든 심한 타격 가운데도 지난 세기동안 7천5백명이란 삼배의 증가로 그 활동성을 보여주었다.
이 수사들은 교구일에 종사하기도 하고 고등학교 신학교 대학에서 가르치기도하고 교리교사로 사회사업가로 일하기도 하고 전도회와 묵상회 출판 「라디오」에 설교하기도 한다.
그들은 「꼰벤뚜알」 미사 성무일도 묵상 신심업 기도 등을 공동으로 하는 수도 규칙을 통하여 먼저 각자 성화(聖化)를 찾고 있다. 이 활동과 관상을 겸한 생활은 성방지거의 본 정신을 모범하는 것이며 세가지 허원을 생각케 하는 검은 수도복과 흰끈을 띠는 사제와 평수사의 생활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이다.
1958년 10월 6일에 처음으로 하국에 도착하여 한국관구를 대구에 두고 범어동본당을 노신부가 사목하고 지금은 한국 첫 원장 범신부님의 노력으로 부산 대여동에 성안또니 기념성당을 짓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