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기까지 (20) 再會(재회) ③
발행일1963-04-07 [제369호, 4면]
날이새자 수련이는 우선 미남이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어쩐지 미남에게 불안해서이다. 순옥이가 옆방에서 아침부터 콧노래를 부르는 것도 미남이에게 들리고 싶지 않았다. 주인 아주머니가 불쑥 주책을 부릴가 겁도났다. 게다가 가끔 찾아드는 화장품 장사 아주머니도 귀찮은 존재이다. 언제나 술집에 나가는 젊은 여자만 찾아다니는 단골장사이어서 늘 하는소리가 남녀관계의 추잡한 소리뿐이다.
『아니, 꼭두식전 어딜 나가요』
주인 아주머니가 부엌에서 소리를 치건만 그저 못들은 체하고 재빨리 문을 나선 것이다.
『엄마 어듸루 가…』
미남이가 물었다.
『은행에 가서 돈찾어가지구 안양으로 내려가는거야』
수련이는 한량없이 가슴이 부풀었다. 오백만환을 은행으로 찾으러 가는 기쁨은 한평생 처음 맛보는 것이다. 조그마한 종이쪽 하나만 은행에 갖다주면 현금 오백만환을 당장에 받는다. 꿈같은 이야기이다. 은행 앞을 지날때마다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보지 않던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은 당당한 오백만환 보증수표를 손에 쥔 손님이 된 것이다. 은행에서 돈을 찾는길로 그는 자기 이름으로 다시 예금을 하고 우선 십만환만 현금으로 찾았다. 미남이 옷도 사주고 어머니에게도 무엇이든 선물을 사서 들고가자는 것이다.
『미남아 아버지가 너 옷 사주라구 돈을 보냈어. 그러니까 오늘은 네 맘대루 좋은 옷을 고르잔말야.』
백화점 어린이옷 진열대 앞에서 수련이는 미남이 귀에다가 이렇게 소근거렸다.
『난 몰라. 엄마 맘대루 해주어.』
상기된 미남이는 꽁무니를 뺐다.
촌에서 자라난 아이라서 백화점이 눈에 서투른 모양이다.
(역시 아이는 서울서 길러야 한다.)는 생각이 새삼 떠올랐다.
이층에서 미남이의 옷과 크레온, 그림책을 한묶음 싸들고 어머니의 옷감을 뜨러 삼층 주단포목부로 올라가려다가 수련이는 발을 멈추었다.
어느 틈에 무슨 재주를 부려 무사이 나왔는지 홍창식이가 층계를 내려오고 있다. 가슴이 덜컥 했다.
(저녀석이 또 귀찮게 굴면 어쩌나.)
몸서리가 났다. 더우기 미남이 앞에서 잡성스러운 수작이나 끄내면 큰일이다. 얼른 층계 뒤로 숨어서 바라보는 수련이는 가슴이 __다. 홍창식 때문에 병이난 진영이는 아직도 성모병원에서 신열이 높아 고통을 받는다는데 거기는 가보지 않고 어디를 돌아다니나 싶었다.
그러다가 자세이보니 그는 혼자가 인었다. 웬 중년부인을 동반한 모양이다. 동반자의 의복이나 몸매로 보아 홍창식이의 아내임이 분명했다. 아마 아내에게 속죄나 하려고 백화점으로 같이 나왔나보다.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젊은 여자를 꼬이는 중년신사의 생태는 수련이가 잘 알고 있다. 이런 사람일수록 이따금 한번씩 무슨 속죄나 하듯이 본부인을 데리고 극장으로 불고기집으로 백화점까지 한바퀴 돌므로써 집에서 속고 사는 부인의 입을 막고 반발을 막아내자는 서글픈 「란데부가 행해지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남편과 같이 즐거운 시간을 갖는것만 대득(大得)하게 여기는 본부인네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수련이는 속도 모르고 홍창식의 옆에 바짝 붙어서서 싱글 싱글 웃음짓는 중년부인이 몹시 딱해보였다.
홍창식이가 좋와라구 쫓아다니는 이십대의 젊고 꽃같은 아가씨에 비하면 어머니벌이요 늙어꼬부라진 할미꽃이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홍창식의 아내는 무엇인가 한묶음 들고서 마냥 웃고있다.
홍창식이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뒷모양을 보며 수련이는 삼층으로 올라섰다. 홍창식이를 만나고 보니 새삼 진영이 생각이 떠올랐다. 어쨌든 진영이 문병은 한 번 더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더우기 새로운 생애를 서두르는 이 때 치러야 할 인사는 깍듯이 치러두는게 뒤가 깨끗할 것 같았다. 입심 세고 극성스러운 진영이는 덧들이지 않는게 좋을성 싶었다.
셈 많고 욕심 많은 술집 아가씨들이 수련이가 잘돼 나가는 것을 축복은 커녕 눈꼴사납고 아니꼽께 여길지도 모른다. 그것이 두려운게 아니라 두고두고 꼬리를 물고 쓸데없는 말썽꺼리가 될지도 모르는 까닭이다. 그 뿐이랴. 수련에게 더욱 큰 문제는 안명철에게 천주교신자인양 묵주를 내논 사실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명철이는 천주교 신자같지 않다. 그리구 보면 틀림없이 영진이가 「홍콩」에서 천주교에 입교한 것이리라. 영진이를 통해 안명철이는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음난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신조를 갖게 되었으리라.
생각이 여기에 이르러서는 무엇보다도 천주교에 입교할 것이 다금해졌다. 그러구 보니 묵주를 몸에 지니게 해준 옆집 아주머니에게도 무엇인가 보답을 해야했다. 지금 수련이에게는 모든 지난 일을 하나하나 깨끗이 거두어 말아놓고 어엿한 박영진의 아내노릇을 해야할 때가 온 것이다.
사람의 처지란 참으로 야릇해서 이제까지는 불평과 비관만 가슴에 서려안고 지내던 수련이였건만 벼란간 남편의 소식을 듣고 돈이 생기고 희망이 밝아지고 보니 모든 일이 조심스러워지고 남의 말이 무서워지기에 이른 것이다.
(어떻게든지, 잘 처리해야지. 남에게 욕 먹을 짓은 이에 할게 아니요, 그동안 사이좋게 지내던 사람들이 아무리 밤거리 술주정판에서 불결한 생애를 그대루 누린다해두 그 사람들에게 조금도 불쾌한 감정을 돋구어주지 말아야 한다.)
수련이는 어머니 옷감을 뜨는 길에 진영이를 위해 치마 저고리감을 한 벌 더 샀다.
(진영이를 찾아가 대강 이야기라두 하구 욕이나 먹지 안토록 입을 막아두어야 한다.)
수련이의 머리에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뒤를 이어 떠오르고 있어 거의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다.
『엄마! 어서 안양으로 가! 응』
미남이가 조르는 것을 그냥 손목을 끌고 성모병원으로 찾아갔다. 우정이 아니라 사교이다. 사교라기보다는 말썽꾼의 마음을 쓰다듬어 후한을 없이하자는 수단이다. 모두가 한 번 실수 술파는 집에 몸을 잠것던 뒤치다꺼리인 것이다.
내가 왜 술집에는 나갔던가….
지금에 이르러 후회한들 임이 때는 늦었다.
술집에서 알게된 친구며 손님들이 엄연이 주변에 웅성거리구 있는 이상 수련이는 오로지 그들의 감정을 덧내지 마는게 상책이다. (당분간 안양에 사는게 좋을거야.)
수련이는 이런 생각을 하며 성모병원 층계를 걸어 올라갔다. 육층 진영이의 병실은 조용했다. 진영이는 이마에 얼음주머니를 올려놓고 누워있었다.
『수련이냐.』
어느틈에 진영이는 눈을 떴다.
『좀 어때….』
『넌 잘됐다지.』
진영이는 부러웁다는듯이 음성이 서글펐다.
『이것. 옷감이야. 어서 일어나서 이 옷 지어 입어.』
수련이는 진영이의 베개 머리에 옷감을 놓왔다.
『너 돈 많이 생겼지』
『많기는… 인제 이 애 아버지가 와봐야 알어』
수련이는 가볍게 화제를 돌렸다.
『이 아이갸 네 아들이냐』
『응…』
수련이는 조심스럽게 미남이를 침대 앞으로 끌어세웠다.
『미남아 아주머니야 인사드려』
넌즈시 밀었다. 그러나 미남이는 꼼작도 하지 않았다.
『애두… 촌에서 자라서 서울만 오면 괘-니 떨어』
『수련아! 너 돈 생겼거든 나 좀 주어. 난 큰일났어. 홍창식이가 경찰에서 놓여나와가지군 어디로 숨어버렸어. 찾아오지두 않아. 병원에 내놀 돈두 ㅇ벗어』
진영이는 눈물을 흘렸다.
『내가 무슨 돈이 있어. 미남이 아버지가 와야지…』
수련이는 꽁무니를 뺐다.
『그럼, 난 어쩌니』
『내 쉬 또올게. 그 때 의논해』
수련이는 이 이상 이곳에 있기가 괴로웠다.
『내일 모레가 약갑무는 날이야. 그 안에 꼭 찾어와 응…』
진영이는 빌다싶이 부탁을 했다. 본부인을 동반하고 백화점으로 쏘다니는 홍창식이는 좀처럼 진영이를 찾아올상 싶지 않았다.
병원에서 나선 수련이는 마치 서울에서 피해가듯이 안양으로 내려갔다. 장터에서 미남이 손을 잡고 인말로 들어서니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성당의 높은 지붕이다. 성당 앞을 지나가려니 마침 신부님이 뜰을 거닐고 있었다.
『신부님!』
하고 미남이가 달려갔다. 수련이도 미남이 뒤를 따랐다.
『너 어머님따라 서울가서 좋은 구경 많이했니』
신부는 미남이와 수련이를 번갈라보며 미소를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