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뜨] 별이 떨어질 때
발행일1963-04-14 [제370호, 2면]
영겁(永劫)의 저편에서 우주의 암흑 속에 빛을 끌고 떨어져가는 별을 바라볼 때 그 스러져간 별을 마음에 두는 이가 있을가? 그러나 자신의 별이 떨어질 때 이제는 두 번 다시 비칠 수 없는 한줄기 생명의 빛이 꺼져 불안한 세월이 머즐 수 없는 오뇌와 더불어 시작하는 것이라면….
혜경이 앉아있는 「베란다」에서 멀지 않는 앞개울에 흘러가는 물소리를 그녀는 하염없이 듣고 있었다. 그녀는 지난 주간에 일어났던 그 일들을 몇백번 마음 속에 되씹어 보았으나 아무런 해결책이 없을뿐 그러다가 보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조차 의식 속에서 희미해지며 엉크러진 마음 속에 가지가지 괴로운 일들이 맴돌아가고 있었다.
『그렇다 오늘은 어떤 일이던 규정을 내려야지…』
어떤 날씨에도 구김살 하나 없이 반반한 백의를 단정히 입고 언제나 쾌활하고 민첩하고 친절하며 어떤 돌발 사태에도 당황치 않을 것을 무언 중에 가르쳐준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데 화요일 그러한 미옥인 간데도 없었다.
간호원의 사명의 존엄을 어떠한 개인의 사정보다 우위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던 그 미옥이, 그 구겨진 간호복! 그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수요일이 되었다. 미옥인 무서울 정도로 환자들을 거칠게 다루고 있었다. 부인 환자들 중에는 가끔 간호원을 울리는 「히스테릭한 결핵환자가 있지만 미옥이 보아주는 환자는 오랜 관절염을 성녀같은 인내력으로 감내하고 있는 불쌍한 중년부인이었다. 미옥인 확실히 변했어. 당시 그녀에겐 그녀보다 훨씬 나이 많은 남자와 집에서 억지로 결혼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말많은 간호원들은 한데 몰켜 서서 미옥의 부친이 어떤 금전상의 사고로서 그 결혼을 성립시키지 않으면 공적으로 어떤 불명예를 입게된다는 사실을 숙덕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태까지 그녀는 자기 일신상의 일을 병원에까지 달고 들어오는 일은 결코 없었는데.
목요일. 사건이 일어난 것은 이날이다. 혜정은 환자의 수술 준비를 하고 있는 미옥이를 거들기에 바빴다. 환자는 아직 젊은 사람이었다. 빨리 건강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 불유쾌하면서도 의사의 지시에 따라 수술에 흠연히 대기하는 철민이란 청년이었다. 그의 베개머리에 드리워졌던 수정묵주, 그의 수려한 이마 짙은 눈섭 밑에 마치 그 일을 예감이나 하듯 우수에 잠긴 그러나 청순한 저런 눈은 그 수정십자가가 원인인가? 또한 그 묵주는 그들 둘 사이의 마음을 그들 자신도 모르게 그런 선의(善意)로 묶어준 사슬이였는지도 모른다. 혜정은 언젠가 미옥이로부터 철민의 일에 대해서 단호한 충고를 받은 일이 있었다.
『혜정아』
미옥은 손위 언니답게 천천히 머리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훌륭한 간호원이란건 제어할 수 없는 감정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거야-』
두어 시간이 지난 뒤 무감각한 신경과 뼈와 근육의 덩어리가 된 철민의 육체가 병실로 돌아왔다. 지금부터 서서히 마취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무의식 세계의 깊은 혼미(昏迷) 속에 빠져있는 것이다. 미옥은 피로에 젖어 맥이 풀려 있었다. 내장에 유착이 생겨 이외로 수술이 오래 걸린 것이다. 더구나 바깥은 나른히 무더운 늦은 봄날이었다.
몇시간이 흘렀다. 근무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철민에게 주사 한 대만 놓으면 이제 그날 일은 끝이다.
그 때 미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잠시 후 돌아온 미옥의 얼굴은 샛파랗게 질려있었고 눈에 뜨일만큼 전신을 떨고 있었다.
그녀는 거의 방심한 자세로 되돌아 갔다. 철민에게 주사를 놓아주러 가는 모양이다. 다시 손에 주사기를 들고 병실로 들어오는 그녀는 아까와는 달리 침착하게 혜정일 돌아보며 말했다.
『혜정아 너 좀 놓아줄래?』
『그래요 언니 제가 하겠어요』
철민은 아직 혼수상태에서 굳어버린 유령의 얼굴같았다. 그리고서 한 시간 후 그는 죽었다. 미정이 주사약을 잘못 넣었던 것이다.
금요일 아침, 병원에 나오자마자 뜻밖에 철민의 죽음을 알게된 미옥의 놀라움, 물론 병원은 그 사실을 쉬쉬 덮어두고 있었다. 그러나 의사들의 조사가 시작되었을 때 처절할 지경으로 당황하는 미옥일 보자 혜정인 앞이 캄캄했다. 미옥에게 품어온 연민이 이제는 저도 모르게 서서히 혐오로 변해가는 것을 스스로 의식했다.
아침 한 시간은 병원 안에 여러가지 소소한 잡일을 하는데 보냈다. 그 사이 복도에서 혹은 세탁장에서 미옥과 맞우칠 때마다 그녀는 혜정을 붙들고 애원하면서 울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혜정이 제발 주사 이야기 말하지마… 약속해주어 응. 만일 그게 탄로되면 난 마지막이야. 두 번 다시 병원엔 이을 수 없게되, 약속해줘 응. 안 그러면…』
혜정을 움켜잡고 흔드는 미옥의 얼굴엔 보기 싫은 경련마저 일고 있었다.
(병원에 있을 수 없어… 두 번 다시… 얼굴을 들고 살 수 있을까? 무슨 소리람. 손에 주사기를 잡을 때마다 철민의 얼굴이, 그의 죽은 얼굴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 있을까?)
소제를 끝내고 의사의 회진시간을 당겨 마친 후 병원안 장내가 백일색(白一色)으로 하얗게 침묵 속에 갈아앉은 순간, 혜정은 마침내 결심했다. (병원을 나가면 시골에 있는 이모한테로 가자. 잠시 은신한 후 장래의 계획을 세우자. 이제 병원과는 영원히 인연을 끊고.) 결국 주사를 놓은 것은 그녀 자신이다. 질책당하는 것도 그녀겠지. 그러면 미옥이는? 그렇다 미옥이 전화에 불렀을 때 그녀가 결혼을 거절하여 그의 아버지가 사기죄로 구속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매 틀림없어. 혜정은 틀림없이 미옥이도 고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옥이, 그녀의 별은 이제 떨어졌다.
미옥인 앞으로도 낮이면 병원에서 여러 사람 앞에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의 별을 _은 지금은 밤의 암흑 속에서 그녀는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그것은 미옥 자신의 문제다. 혜정이로선 그 과오의 죄책을 자기가 지기로 했다. 간호원으로서 인류의 고통을 적으나마 덜어주겠다던 그녀의 이상은 이제 끝났다. 이제부터는 백화점이나 사무실같은데서 생계를 찾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짐을 들고 병원문을 나서자 고개를 둘러 마지막으로 병원을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 희부옇게 솟은 건물의 창마다 이미 푸른 불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형언할 수 없는 감회로서 터질 듯했다. 검푸른 하늘엔 저녁별이 하나 둘 떠오고 있었다. 앞개울에 여울물 흐느끼는 소리, 문득 그녀는 그 물소리에 섞여 한 개의 소리를 듣는 환각에 잠겼다.
『당신은 미옥일 살렸소 이제는 천주님이 당신을 살려줄 것이요』
그것은 웃고 있는 철민의 부드러운 음성이다. 그녀는 「세타」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묵주를 더듬었다. 혜정이 그의 머리맡에 묵주를 신기한듯이 바라볼 때 그가 말없이 웃으며 내밀던 그 수정묵주였다.
(편집실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