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48)
발행일1962-09-09 [제342호, 4면]
【프랑스어를 배우게 하는 것 그것은 우리들의 신하가 안되기 위하여 우리와 평등의 것이며 우리와 모든 것에 있어서 조건을 갖게하는 것이며 어떠한 것에도 누구에게나 신세를 안끼치기 위해서이다.
이와같은 것은 조마간에 돌아올 것이었다. 그때문에 바로 가까이 「호가아르」의 군인과 관리는 전부 이 지방 종족의 출신이 될 것이다.』
신부는 또 이와같이 말했다.
『프랑스어를 배운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대한 문제이다. 첫째로 중개자 없이 당국과 교셉을 하기 위해서 둘째로는 당국이 집적으로 「켈 아하가아르」족의 사람들을 인식하며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관한 테마를 믿지 않기 위해서 제3으로는 피해를 입은 「켈 아하가아르」인이 충실하다고는 할 수 없는 통역에 중개에 의하지 않고 이의(異議)를 말할 수가 있기 위해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모든 진보의 혜택에서 될 수 있는대로 이탈하고 있는 샤르르 수사가 사하라 사막 횡단철도 무선전신 혹은 경작과 사육의 발달 등이 어떠한 모양으로라도 사하라 속에 할 수 있는대로 빨리 침투해가는 것을 보기를 열망하는 것은 같은 정신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투아레그」인에게 선물을 할 때에 싼 물건을 절대로 주지 않았다.
할 수 있는데로 좋은 것을 그는 찾아내었다.
우크레므에게 총을 보내려고 한 그는 프랑스에서 최고급품의 것을 사도록 부탁했다. 신부를 둘러싼 세상은 항상 변화하고 있었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나자렛의 이상에 따라 살았던 것이다.
1911년 5월 11일부로 어느 트라피스트 수도자에게 그는 편지를 썼다.
『이곳 생활과 트라피스트의 생활을 비교해본다면 당신은 마찬가지로 엄격하고 그러나 저보다 훨씬 가난한 까닭에 매우 쓰라린 생활을 찾아내었을 것입니다. 더우기 기후가 나빠서 사람들을 피로하게 만들고 또 식료품이 유럽의 물건과 전혀 다르므로 그것은 더구나 쓰라린 것이었읍니다. 의복과 주택은 프랑스에서 수공을 많이 들여 만든 의복과 가옥같은 것이라고는 찾을 수 없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빈약한 것 밖에는 찾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편이 나자렛의 예수 의복과 가난한 집과 비슷합니다.
모든 것이 정한 시간대로 되며 엄격한 복종으로서만 된다 하더라도 트라피스트수도원 내의 외면적인 세밀한 세측이 조금도 없고 완전히 소박한 가정생활 밖에는 없다는 점에서 당신은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생활과는 다른 생활을 인정할 것입니다. 노래를 석은 제식도 미사도 없고 성무일과 외에는 소리를 내서 기구하지 않으며 그러나 성체 앞에서 마음대로 천주를 찬미하거나 염도하거나 무언의 기구와 독서를 하거나 하는 점에서는 트라피스트 생활과는 다른 생활을 당신은 인정하시겠지요.』
이 수년간에 북아프리카에 있어서 프랑스의 확장은 점차로 보다 넓은 지역에까지 미쳣다. 1907년 5월 카사브랑카에 최초의 상육을 한 후에 프랑스군은 1922년에 반란을 일으킨 남부를 진압하려고 하는 군주 무레이 하위트를 원조했다 리요테이와 구우로오의 지휘하에 프랑스군은 「휏쯔」와 「마라켓취」를 넘어서 진군했다. 많은 불귀순의 「투아레그」인(혹은 호가아르의 대부분은 아제에르의 출신자)이 혹은 습격을 받고 혹은 새로운 유격병의 증모를 하며 분쟁의 씨를 뿌리려 했다.
처음부터 이 소동에는 「시레나익크」의 사막의 속까지 저 유명한 「쿠우후라」의 오아시스에 본거지를 둔 「세누시스」 교단원의 일대 종교단체가 힘을 빌리고 있었다.
뭇사 혹은 사관이 은둔소 옆을 지날 때마다 여러가지 정세를 신부에게 이야기했다. 신부는 이와같은 위험한 정세를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호가아르」에 있는 모든 사람의 공통된 이익을 손상하기 때문이었다. 신부는 해야될 것을 그리고 그것은 명백한 것이었으나 잘 이해했다. 즉시로 두개의 부속지를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는 「아제에르」를 위하여 또하나는 「호가아르」를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지휘관에게 재편성의 계화서(計畵書)를 보냈다.
그의 목적은 대단히 간단했다. 그는 프랑스군 사관들이 「투아레그」을 잘 알고 있으며 그 지방을 잘 통치하는데 충분한 인원을 갖추도록 원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사관들이 그 임무에 완전히 적합한 인물일 것을 원했다.
신부는 또 눈앞에 보이는 즉시 할 수 있는 일보다도 먼데까지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모록코 점령에 따른 사하라 사막 점령에 의한 수우단과 알제리아의 병합에 의해서 아프리카 서북부에 수립된 프랑스 제국은 그 통치가 좋고 나쁜 것에 따라서 프랑스 국력을 강대하게 혹은 약소하게 하는 한가지 원인이 될 것이다. 지금은 3천만의 주민이 있으나 평화한 시대에 있기된다면 50년간에는 그 두배의 인구로 될 것이다.
그때 영토와 산업이 현저하게 발전하고 풍부하게되며 철도가 가로 세로 뻗쳐 있고 우리 프랑스의 무기를 취급하는데 익숙하여서 우리 프랑스의 풍속에 어색함이 없는 주민들이 가는 곳마다 살게될 것이며 그들의 양민들은 우리들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만일 그들을 우리에게 연결시킬 줄 모르면 그들은 그곳에서 우리를 내쫓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들은 단지 이 영토의 전부를 상실할 분만 아니라 우리들이 이 영토를 통일해준 것이 우리들에게 대항할 것이다.
샤르르 수사는 식민지 정책이 옛날처럼 원주민으로부터 모든 수단으로 무기한하고 착취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과는 달랐다. 알프리카 침입이 비약적으로 행해지고 있던 이 시대에 이미 신부는 만일 식민지 정책이 즉시로 언제나 만인의 진보가 된다는 의미를 가지지 않고 계속 된다면 이 운동이 변증법적인 역전이 단기간 동안에 일어남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화하게 하며 기아와 노예제도를 제외함으로써 만족한 것은 아니다.
샤르르 수사가 식민지와 원주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태도에는 때때로 『자부(慈父)주의적』인 것이 보였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보통으로 이 말이 의미하는 것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었다. 왜냐하면 신부는 자기를 위한 야심은 죽였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항상 여러가지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의 자애주의는 권리보다도 의무를 조중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 대하여 충실하기 위하여 변증법적으로 반대의 입장에 역전할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입장은 하나의 과도기를 표현할 수 있는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원주민을 회심시키며 자선을 베풀 분만 아니라 또 정당한 사업을 위하여 일하려고 신부는 자기의 「지도서」를 편찬할 때에 창립한 단체의 규칙을 쓴 것은 바로 그것인 것이다.
『한 국민은 그 식민지에 대하여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대하는 것과 같은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교육과 교수로서 식민지의 사람들을 자기들과 동등으로 혹은 자기들 이상으로 뛰어났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썼다.
신부가 그 은둔소에서 일과 기구로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는 긴 세월동안 「호가아르」는 평온하였다.그러나 서부에서는 「부레드 에스 시바」에서 일어난 습격이 「루우아」와 「아드라아르」까지 미쳐왔다.
1913년 4월 8일 가르델 중위는 40명의 용병과 6명의 토민병과 함께 「투아레그」 「아제에르」족 삼백50명에 의하여 리아네 근처의 「에쎄이양」에서 습격을 당했다. 한사람의 「투아레그」인이 적을 향하여 부르짖었다.
『프랑스인도 우리들의 형제다. 우리들도 그들로부터 은혜를 받고 있다. 죽을 때까지 그들을 버리지 않는다.』 전투는 때때로 중단되면서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날이 새면서부터 가르델과 그 부하는 총검을 들고 돌격하여 마침내 승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