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또 하나의 갈멜수녀원의 개원을 기다리고 있는 이때인지라 갈멜회에 대하여 벌써 무슨 글을 썼어야 했을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개혁수도회 창립이라는 교회 전체에 대한 이 자극적인 사건을 두고 의당 무엇을 써야 할 의무마저 느끼는 바이다.
세속과의 접촉을 완전히 끊고 오로지 천주께의 효성을 다하는 갈멜봉쇄수도원이 지금의 엄격한 규율로 개혁(改革)된지 4백주년을 맞은 날이 8월 24일이었다.
서울 · 부산에 이어 대구에도 이 존귀한 회가 개원한다.
9월 12일경 오지리 「마리아 셀」 갈멜수녀원에서 수녀들이 대구에 도착하면…
힘드는 갈멜회원의 글을 얻어 이 수도회 존재 의의를 좀더 이해하며 영혼 세계에서의 접근을 꾀하는 것은 뜻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 편집실 -
지난 성 발도로메오 종도 첨례날은 성녀 대(大) 데레사가 「아빌라」에서 성녀 자신이 말씀하신대로 『개혁(改革)』된 첫번째 수도회를 창립한 그 4백주년을 맞이하는 날이다.
이 사건은 우리들에게 허다한 문제를 제기한다.
무엇때문에 개혁을 했던가? 갈멜 수도회가 어느시대에 발족했는지 그 초창기에 대하여는 소상치 않다. 이것을 증명할 만한 명확한 역사적 근거가 없다. 그러나 수도원 자체 안에 특히 갈멜회의 예전 가운데(엘리아 성인첨례의 일과경과 초입경 참고)는 이 수도회가 엘리아 선지자에게까지 소급해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 전통적으로 굳게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확고부동한 사실은 저 갈멜산상에서 수도생활을 한 일단의 은수자들을 영도했으며 예루살렘의 대주교인 알베르트 성인이 간략하남 갈멜의 정신을 충분히 표현한 엄격한 회칙을 만들었고 1247년에 이르러 교종 인노센스 4세께서 이 회칙을 윤허하신 것만은 확실하다.
이것이 갈멜 수도회의 『원래의 회칙』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후 이 수도회가 서구라파에 전파되어 들어옴에 이르러 역대 교황께서는 그 시대와 생활에 알맞게 3차에 긍하여 그 규칙을 완화한바 있었으며 특히 단식과 침묵에 대한 조항을 완화케 했던 것이다. 여자들을 위한 이 수도회의 지원(枝院)이 처음으로 창립된 것은 성녀 대 데레사보다 대략 백년전의 일이며 세차례로 완화된 규칙에 따라 수도생활을 쉽게한 수녀원이었다.
20세의 소녀 아빌라의 대 대레사는 이런 종류의 어떤 수녀원에 입원했던 것이다. 성녀가 이 수녀원에서 27년이란 세월을 지내는 동안에 갈멜이 규칙, 물론 전연 다른 것은 아니었으나 말하자면 그 핵심을 새로이 발견하였으니 그것은 곧 『모든 수도자는 각각 자기 독방에서나 혹은 그 주변에서 밤이나 낮이나를 가리지 않고 천주의 계명을 심사묵고할 것이며 기도속에서 보내야만 한다.』라는 것이었다. 성녀의 눈앞에는 갈멜 산상에서 수도하는 은수자들의 모임이 완연히 나타나보였으며 그들의 생활정신을 구라파에서도, 또한 여자들을 위하여서도 실현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로 성녀의 마음이 급박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일 근본적인 요구로서 엄격한 봉쇄(封鎖)를 들게 되었으니 이것은 세속과의 완전한 격리다. 사실, 옛날의 은수자들이 높은 담을 쳐놓고 그속에서 생활한 것처럼 수녀들도 외부에서 보여서는 안되고 방문객을 전연 대하지 않거나 혹은 극히 소수만을 대하며 또 이 방문객들과도 세속일에는 전연 관여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수도자들은 각자 조그마한 독방을 하나씩 가지고 그 속에서 혼자 일하고 기도하며 설혹 바깥에서 할 일이 있을 대라고 그 일을 마치면 지체없이 자기 독방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성녀 데레사가 요구하는 둘째로 중요한 조건은 엄격한 청빈(淸貧) 생활이다. 가옥구조며 세간사리며 의복이며 천상이며 음식에 있어서 수녀들은 극히 간소하게 살아야 한다. 생활을 안일하게 하거나 아름답게 하거나 허영만을 위한 것들은 수도원 내에 아무것도 들여놓을 수 없다.
수녀들은 신공 시간 외에는 그야말로 부지런히 노동을 해야한다. 수녀들은 누구나 다 자기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수녀들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동을 해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수녀들은 자기의 노동에 대하여 큰도움이 있을 것을 확신해야 하며 모든 규칙을 충실히 지켜 생활한다면 그 노동으로 얻은 수입으로도 살아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열심과 쇤뢰와 완덕에의 노력만 있으면 수녀들은 살아나갈 수 있다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된다.
끝으로 침묵을 요구한다. 천주님의 소리는 마음 속에 은밀히 들리는 것으로 우리가 소음(騷音) 중에 산다고 천주님은 그 음량(音量)을 높여 우리의 소음에 맞추어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성녀 데레사는 그 딸들에게 엄격한 침묵을 요구하였으며 이 침묵은 휴식을 위하여 하루에 불과 두시간만 면제되는 것이다. 이 두시간 외에도 일을 하는데 극히 필요할 때는 말을 하기전에 자기가 할 말 한마디 한마디를 잘 저울질하여 꼭 필요한 말만 하여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수녀들은 조금씩 『항상 주님과 더불어 내적 담화(談話)를 하는 가운데 생활하며 오직 천주님의 성의(聖意)에만 귀를 기울이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봉쇄 청빈 침묵 이 삼자는 물론 외형적으로도 나타나 보인다. 그러나 남에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다른 모든 일에 가장 앞서는 긴요한 것이 있음을 말하여 둔다. 그것은 곧 일상 생활의 극히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그 공부를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절대 복종이다.
『수녀들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자기 자신의 의사는 꺾어버려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수녀들은 가능한한 환접한 태도로 주님의 요구를 다해야 한다.
『누 만일 나를 따르기를 원하면 자기자신을 버려야 한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갈멜회의 모든 속죄의 수련 생활, 그것은 흔히들 무슨 흥미꺼리처럼 일반의 활제에 오르기도 하지마는 이 생활 자체는 그야말로 무미건조한 것으로서 그것은 오직 앞에 말한 모든 요구에 도달하는 한갖 방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를 위하여 성녀 데레사가 원래의 회칙으로의 복귀운동을 했었던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성녀 데레사가 입원했던 완화된 즉 쉬운 규칙에 따른 그 당시의 수도원의 생활을 잠간 살펴본다면 쉽게 그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으로 수녀원에 드어가서 어떻게 수도생활을 해야할지도 모르는 착한 소녀들, 그들은 밤낮 일가친척을 찾아 다니기가 일수며 찾아오는 사람들과 응접실에서 시내소식들을 듣노라고 몇시간씩 허비하는가 하면 혹은 예쁘게 꾸며 놓은 자기방에서 장난 같은 수공일로 세월을 보내기가 보통이었다. 또 그들은 서로 「티타임」에 초대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곧 나쁜 수도원은 아니었다. 성녀 데레사 자신도 말하자면 이러한 유(類)의 생활을 남들처럼 좋은 마음으로 체험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특기할 일은 「개혁」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나온 것이 바로 위에서 말한 어떤 「티파티」에서 였다는 것과 이러한 수도원의 동지 수녀들 가운데서 개혁된 수도원의 핵심동지들을 규합했었다는 것이다. 물론 완화된 규칙에 따른 쉬운 수도원에서도 수녀들은 능히 세상악(世上惡)에서 막을수도 있었으나 『원래의 규칙』의 강력하고도 철저한 요구를 충복시킬 도리는 없었던 것 같다.
즉, 「원래의 규칙」에는 모든 것을 최대의 노력과 절대적인 과업으로 수행해야 하게되어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전력을 다하여』 『오직』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 등 이런 것이 곧 『원래의 회칙』을 일우고 있는 근본 취지였다.
성녀 데레사가 시도한 것이 곧 회칙이 요구하는 이 각가지 절대성을 그의 수녀들로 하여금 마음 깊이 일깨워주는데에 있었다. 그리하여 이 비타협성을 성녀 데레사는 그의 많지 않은 회원들에게 실현시켜 볼려고 했었다. 그러나 성녀는 진심으로 모든 수녀들이 다같이 한 가족처럼 일심단결될 때에 비로서 실현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왜 모든 것을 이렇게 해야만 할까? 왜 컴컴한 담우리 속에 살아야 하며 왜 세상사와 격리하는가? 왜 죽음처럼 침묵한 가운데 사느냐? 왜 창문에는 살창을 끼우며 응접실은 살창으로 막아 두었을까? 이 모든 것이 마치 죄수들을 대하는 듯하며 우울한 여자들의 일단이 그 속에 살고 있지나 않나 싶어지게 마련이다.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일은 데레사 성녀께서는 오로지 천주사랑의 성녀, 천주님의 사랑을 가르치는 여인이 되기를 한갖 노력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성녀께서는 천주님의 사랑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 후배들에게 권유한 모든 것은 자기 스스로 다 체험해 보신 연후 그 엄격히 경험한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 방법을 능히 지킬 수 있는 것이며 곧 실행에 옮겨 일로 매진할 수 있는 것들이다.
천주님이 이 생활로 부르신다는 것을 명확하게 아는 사람 또 성소(聖召)를 완전한 자유의사에서 따르는 사람만이 이 생활을 즐거운 마음과 자유롭고 거기다가 명랑하게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천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이웃을 위하여 잇달아 피어날 것이며 천주님 또한 그를 위하여 교회 안에 알맞는 자리를 마련해 주실 것이다. 마치 천주님이 성녀 소화 데레사에게 그의 위치가 교회의 심장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주신 것처럼.
「아빌라」의 성네 대 데레사는 교회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필요한 천주님의 은총을 비는 교회 안의 기구하는 핵심체가 되기를 원했었다. 이 점에 관하여 성녀 소화 데레사는 『그들은 싸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 싸우는 이들을 위하여 사랑할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현금 가르멜수녀원의 지원(枝院)이 많이 창립됨에 따라 갈멜회는 여자들의 수녀원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갈멜회는 원래 순전히 남자들을 위한 수도회였으니 오늘날 다시 남성들의 강력한 힘으로 갈멜의 정신이 다시 한번 실현되기를 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 글을 마치기에 앞서 갈멜의 여왕을 다시 한번 뭉상하지 않고는 끝을 맺고 싶지 않다. 아주 옛날의 어떤 구전(口傳)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제일 첫번째의 마리아 성전이 그 건립당초에는 성지(聖地)에 있는 갈멜산 위에 서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갈멜회가 존속하는 한 언제나 갈멜산의 성모님을 그 회명에 모셔왔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또한 갈멜회는 천주님의 시녀이시며 통고의 어머니시며 이 특수한 회의 모든 은총의 전달자신 여왕이 되어 주십사고 당연히 기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성모님의 어머니다운 보호가 확실히 있다고 믿는 바이다.
T. 엘리아 修女(대구 갈멜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