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레스뜨리나의 復活節(부활절) 聖歌(성가)
발행일1963-04-14 [제370호, 4면]
빨레스뜨리나는 1526년에 났다. 그의 이름은 지오반니 삐에르루이지이다. 중부 이태리 빨레스뜨리나에서 났고 거기서 불멸의 명성을 떨쳤기 때문에 보통 빨레스뜨리나라고 불린다.
그는 열한살 때부터 성 마리아 마죠레 성당에 봉사하였고 레벨씨에게 사사(師事)한 일이 있었다. 그의 천재적 존재가 1544년 고향의 주교좌 대성당 참사회장에게 인정되어 거기 「올가니스트」와 음악장이 되기 위해 「로마」를 떠나 빨레스뜨리나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성소인 음악적 소질을 발휘할 수 있었던 곳은 영원의 도시였다. 빨레스뜨리나의 주교 추기경이었던 교황 율리오 3세에게 인정받게 되어 교황은 그에게 율리아의 성당의 아이들을 맡겼다.
1555년에 비록 평범한 성대였으나 「식스맨」에 입대 허가되었다. 그러나 율리오 3세 별세 후 바오로 4세는 그가 신자이고 기혼자란 이유로 그를 교황성당에 채용하지 아니했다.
계속해서 성요왕 라때란 성마리아 「로마」신학교 율리아나 성당의 음악장을 역임한 바 있으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교황 성당 음악을 지도하지는 못했다. 그는 「로마」음악계에서 오십년동안 종사하다.
1594년 2월2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음악적 특징은 정신적 모든 노력을 「로마」에서 쏟았다는 것이다. 그에게 최고 균형을 잡기 위해 나아가는 놀라운 노력이 보인다.
그리고 이 균형에서 조화로 나아간다. 그는 한 가지 야심이 있었다. 즉 교회에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대등성(對等性)을 다시 찾아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11일세기부터 교회는 전례적 성가의 조화를 찾기 위한 다음 합성곡의 운동이 일어났음을 독자는 기억할 것이다. 빨레스뜨라는 이 잃어버린 조화를 다시 회복시키는 다음 합성곡을 많이 작곡하고자 했다. 그는 여기 성공하였다. 빨레스뜨리나적 「스타일」은 계승자로 선포되었다. 그 후에 소위 전례적 행동에 음악의 참여에 관한 운동이 그로 말미암아 이뤄졌다.
그의 업적은 찬란하다. 93의 미사곡 179의 「모뗃」(성가) 하나의 「스따받마뗄」 「예레미아애가」 그리고 특히 「말셀교황」 미사곡이 불후의 작품이다. 부활을 위한 다음 「모밷」 이다음 합성곡으로 부활절 때 감상하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빨레스뜨리나의 부활절을 위한 쉽고 경쾌한 합창이 있다. 신자들이 후렴으로 세개의 「알랠루야」를 창하고 계는 답창(RESPONSORIUM) 형식으로 노래할 수 있다. 찬가는 전례 끝에 부르는 성가의 「카테고리」에 들어간다. 이것은 매우 경쾌하고 부활의 기쁨이 넘치고 있는 E장조곡이다.
이태리 가사의 「라띤」역은 이러하다. 『알랠루야(3번) 전쟁은 끝났다. 승리를 획득했다. 기뻐하고 노래하자 알랠루야』 작은 단장격(短長格) 팔철음(八綴音)으로 된 죽음과 지옥 위에 예수의 승리를 상기하는 것이다. 네 개의 「알랠루야」의 절규는 계속되는 기쁨을 강조한다. 혼성 4부가 제일 좋고 성가대가 부족할 때는 4부 「올간」 반주에 「소프라노」 「엘터」 「배스」도 허락할 수 있다. 그러나 「소프라노」 「테너」 「배스」는 좋지 않다. 여성 혹 아동 2부의 편곡은 좋으나 남성 2부는 좋지 않다. 대학에서나 세련된 어떤 본당에서 가능하다면 후렴 「알랠루야」를 단부 혹 4부의 「코랄」형식으로 창할 수 있다.
조금 어려운 것은 8분의 6박으로 「리듬」이 변하는 곳이다. 속도는 너무 느리게도 너무 빠르게도 말고 8분의 3박 정도로 할 것이다. 화음이 잘 되어 있다. 불협화음이 없고 거의 기본적인 환전화음이다. 「코랄」로 창할 때는 발음 내리는 것이 좋다. 보통 일반이 부를 때 E플렏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부활의 광명에 젖어 이 경쾌한 성가를 기쁨으로 배우고 노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