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기까지 (21) 再會(재회) ④
발행일1963-04-14 [제370호, 4면]
신부님에게 따뜻한 인사를 받은 수련이는 무한 든든해졌다.
『신부님 교리공부를 얼마나 하면 영세를 하겠읍니까?』
넌즈시 물었다. 신부는 곧 낯빛을 고치고 정중히 대답했다.
『열심이 배우고 외우시면 얼마 오래지 않아 영세하실 수 있을겝니다』
『영세는 아무 때나 할 수 있읍니가?』
『글쎄요- 얼마 안 있으면 팔월달 성모 몽소승천때가 옵니다. 그 때 여러분이 함께 영세합니다』
팔월달이라면 몇 달 안 남았다. 과연 그때까지 교리공부가 제대로 될지 걱정이다.
『영세받기 전에 시험이 있다지요?』
신부는 빙그래 웃었다.
『시험이라면 시험일지 모르나 「찰고」라구 합니다』
『찰고에 통과되지 못하면 또 다음번을 기다려야 하죠』
『온 천만에 왜 그런 생각은 하세요. 열심이 배우고 께치면 되는 일입니다. 아에 어렵게 생각 마세요. 입교할 생각만 견고하면 어려울게 없어요』
신부는 따지듯이 결론을 내렸다. 인제는 더 할 말이 없다.
『잘 알았읍니다.』
『그럼, 서울서 예비를 하시렵니까?』
『아-아뇨. 영세 하기까지 안양서 신부님께 배우려구 합니다.』
신부는 유쾌히 웃었다.
『하… 하… 그만큼 성의가 있으시면 다- 뜻대루 될거야요. 아무 걱정 마시구 교리반에 나오세요. 찰고를 받는데두 여러가지를 참작하거든요. 첫째가 정성입니다.』
수련이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천주교에 입교하려는 정성은 누구에게 지지 않으리라는 신념이 있는 까닭이다. 마음속 어디인가 불타고 있는 천주님의 광명을 수련이는 역역히 느끼고 있다. 그 한가닥 광명이 어제보다도 오늘이 더 밝아지는 벅찬 감격을 몸소 맛보고 있는 수련이는 이미 천주님의 따뜻한 그늘 아래 무릎꿇고 있는 자기의 모습을 알고있는 까닭이다.
이제 남은 일은 천주교에 입교하기에 필요한 절차만이 남은 것이다. 조급한 사정으로 따진다면 그저 오늘 이자리에서 곧 영세를 하고 몸에 지닌 묵주를 끄내 신부님에게 방사를 받고싶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에서 행하고 지키는 예절과 과정을 무시하는 일이 된다.
『밤을 새워서라도 교리공부는 서두르겠어요!』
수련이는 신부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 댇바은 신부님에게 뿐이 아니라 숫제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맹세이기도 했다.
『미남이 할머님은 그간 많이 배우셨으니 우선 댁에서 예비를 하세요.』
신부는 차근히 일러주었다. 신부님과 작별을 하고 집에 돌아온 수련이는 우선 교리책을 펴들고 뒤뜰로 돌아갔다. 뒤뜰에는 접시꽃이 한창이었다. 큰 감나무 아래에는 적은 평상이 노여있다. 미남이가 낮잠 자는 곳이다. 수련이는 평상에 걸터앉아 책을 펴들었다.
『수련아! 이야기 좀 하자! 궁금하구나 어머니가 다가왔다.』
『어머니 우선 교리문답 한 번 읽어보구요』
『온 애두, 웬일루 그렇게 서두르냐』
어머니는 어이가 없다는듯이 픽 웃었다.
『어머니하구 같은날 영세를 받겠어요. 신부님께서두 우선 어머니한테 배우라구 하셨어요』
『내가 머, 알아…』
『그래두 많이 아신다구 하시던데 자- 어서 이리오세요 아는대루 일러주세요』
수련이는 어머니를 끌어앉히고 한참동안 공부를 했다.
『엄마 저… 목장 아저씨가 왔어』
미남이가 달려들었다.
『머… 목장 아저씨』
『인상이가 왔나보구나』
어머니는 먼저 일어서며 수련이 눈치를 살핀다. 혹시나 수련이가 인상이를 푸대접하여 불화한 일이라도 생길가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이애… 너무 톡톡 쏘지 말구 좋게 대해.』
어머니는 미리 다짐을 하였다.
『온-어머니두… 제가 지금 인상이는 만나 무엇해요』
수련이는, 어머니를 흘겨보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허불치 않는다. 그것은 그 흘겨보는 눈매가 어렸을 때 귀엽게 보던 그 모습 그대로인 까닭이다.
『그래선 못서 이런 때일수록 선선히 대접해두어. 그래야 뒤가 깨끗하대두. 안그래…』
어머니의 음성은 차차 무거워갔다.
『엄마…』
미남이가 어느틈에 나아가 인상이 손목을 끌고 들어온다.
『수련아 어서 좋은 낯으로 인사해』
어머니가 또 한 번 일렀다.
『어서오세요』
수련이는 마지못해 반기는체 했다.
『참, 미남이 아버지가 쉬 오신대죠?』
『………』
『축하합니다. 오랫동안 기다리시더니 끝내 성공을 하셨군요.』
인상이는 아주 체념을 했다는듯이 명랑했다.
『그간 여러가지로 심려를 끼쳐드려서… 정말 감사해요.』
수련이도 마지못해 응수를 했다.
『그리구 저… 전 일간 제주도루 떠나갑니다.』
인상이가 불쑥 이런 소리를 했다.
『아-니 제주도엔 왜요?.』
『거기가서 농장을 꾸며 보려구요. 농장을 경영하다보니 제주도루 갈 생각이 나서요….』
『아…니 왜 그렇게 먼데루 가?.』
수련이 어머니두 곁에서 한마디 했다.
『제야 머, 홀몸인데 어디는 못가겠어요.』
인상이는 홀몸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오늘까지 누구를 기다리느라고 결혼도 하지 않았던가 되씹어보는 마당이다.
『어디 가서든지 부디 성공하세요』
수련이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오늘 뵈러온 것은 농장일입니다. 여러해 두고 정성들여 시설도 하고 정도 들인 농장이라서 그냥 내버리구 갈수는 없고 꼭 수련씨에게 부탁드리구 가렵니다.』
뜻밖의 제안에 수련이는 낯빛을 고쳤다.
『아-니 댁 농장을 제가 다 부탁하시다니…』
『하…하… 무조건 부탁드린다는건 아니죠. 제 농장을 사세요. 사신다면 싸게 양도할 생각이야요』
인상이는 벌써 수련이가 몇백만환 돈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필경 어머니가 자랑담아 소문을 퍼뜨린 것이리라.
『머… 늘 저이 농장을 맘에 든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러니 사세요. 돈은 주시는대루 받아도 좋아요. 제가 누리려던 보금자리에 수련씨가 대신 드시는 것은 전 전 환영입니다.』
인상이의 말끝은 흐려졌다. 마음으로 우는지도 모른다. 농장을 마련할 때는 수련이와 둘이서 한평생 재미를 보려는 꿈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인제 그 꿈은 송도리째 깨지고 만 것이다. 수련이의 과거를 알고 미남이까지 어루만지며 결혼하기를 갈망하던 인상이가 아니였던가. 수련이가 뜻밖에 소식없던 남편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소식은 인상이를 몹시 슬프게 하였다. 그러나 하는 수 없는 일! 이제는 인상이 자신이 수련이의 주변에서 멀리 떠나려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수련아 이왕이면 우리가 사잣구나』
어머니는 눈치도 모르고 농장을 사려는 욕심 뿐이다.
『어머닌 좀 잠자코 계세요』
수련이는 어머니를 또 한 번 흘겨보았다.
『제주도에 혼자 가서 어떻게 견디시려구…』
수련이는 진심으로 물었다. 미안한 마음이 지나처 인상이의 일이 몹시 딱해진 것이다.
『전 외롭기 않아요. 자… 이걸 보세요』
인상이가 바른 손을 내밀었다.
『어머…!』
수련이는 몹시 놀랐다. 인상이의 손바닥에는 묵주가 놓여져 있지 않는가!
『그럼 천주교…』
『네. 지금 열심이 교리공부를 하고있읍니다』
『참 고마운 일야요』
수련이는 마음이 흐뭇해졌다. 인상이는 결코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리라는 신념이 생긴 깓락이다. 손에 묵주를 쥐고 성모경을 영하는 가슴에는 언제나 비는 마음과 평화한 빛만이 깃들것을 아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