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共産主義問答式解說((공산주의문답식해설)] (37)
발행일1962-09-16 [제343호, 2면]
共産主義 歷史 - 레닌부터 흐르시초프까지 ③
【문258】 1905년 시도한 혁명 직후 레닌편으로 보아 무엇이 가장 현저한 성공이었는가?
【답】 먼저 우리는 아래와 같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파벌적 의견대립으로 1905년의 혁명은 별다른 효과도 보지 못함을 목도한 레닌은 자기 저서 「좌익공산주의」에 선언하기를 1950년 시도한 혁명을 꼭 그대로 반복하지 않으면 10월 혁명의 승리를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레닌은 1905년 혁명 이후 맑스주의의 무신론적 기반을 더 광범위하게 재연시킬 운동을 했다.
이 운동의 골자가 그의 유명한 책 「유물론과 경험적 비판」 속에 적혀있는데 변증법적 유물론이 맑스주의의 세계관이란 것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는 변증법적 역사관에 의한 유물론에 대해서 질문하는 자는 누구든지 신을 찾는자, 또는 『신을 만드는 자』라고 딱지를 찍어버릴려고 주로 그가 노린 바는 세계는 정신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순이상주의 철학자들이었다. 그러나 물질게를 인정하고 거기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감히 대항해서 싸울려고는 하지 않았다.
여기 한가지 흥미있는 것은 무신론적 독재를 건설하기 위한 1917년 폭력혁명을 준비하는데 레닌은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을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훈련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문259】 레닌이 어떻게 「10월혁명」(1917년 11월 7일)의 실현을 보게되었나?
【답】 1917년 몇달동안 레닌은 자기 추종자들과 합의를 본 후 핀랜드에서 숨어있었다. 또 이동안 그는 『국가와 혁명』이란 책을 썼다. 이 책의 내용에 곧 유산계급정부를 폭력으로써 없애버려랴 한다는 필연성을 주장한 것이다.
10월 7일 레닌은 지금의 「레닌그라드」인 「빼뜨로그라드」로 와서 자기당의 중앙위원회를 구성하여 혁명전투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가 「카렌스키정부」를 반대하여 봉기하도록 조종하는 한편 볼쇠뷕스파가 쏘비에트의 모든 의회를 장악했는데 이 의회는 1905년에 생긴 한 조직체이다. 레닌이 자기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은 멘쇠빅스파의 모든 소비엩을 체포하고 이들을 「구데타」 형성에 동원 이용했기 때문이다.
【문260】 이와같이 소비엩을 이용하여 소수파로서 레닌이 「카렌스키정부」를 반대하고 일어난 행동이 결국 반혁명이 아닌가?
【답】 그렇다. 「카렌스키정부」가 「짜르 왕조」를 번목시킨 유일한 힘이었고 이들이 러시아에 민주주의적 헌법을 작성해서 국민의회를 소집했던 것이다. 레닌은 이 국민의회를 무장한 소수도당으로 해산시키고 공산당 독재를 완성시켰다. 이 공산당 독재가 오늘날까지 러시아를 좌우하고 있다.
【답】 「소비에트」란 본래 희미하게 조직된 단체인데 주로 노동자 농민 그리고 군인들로 구성되었다. 1917년 11월 7일 「빼뜨로그라아드」 「스몬리」궁전에서 제2차 전국 「소비엩」대회가 열렸다.
바로 아닐 레닌의 지령을 받은 「빼뜨로그라드소비엩」가 소위 가정부(假政府)를 분쇄해버렸다. 그날 오후 회의시(時)를 기하여 볼쇠빅스파가 완전히 세력을 잡고 「소비엩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레닌이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문262】 「소비엩」가 나중에 무슨 이름으로 바꿔졌으며 어떤 정부를 세웠는가?
【답】 지금 우리가 부르는 소련사회주의연방국이란 이름으로 정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무산계급의 독재 혹은 노동자들의 정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레닌과 특히 스탈린이 『레닌주의의 난문제』란 책에 이 무산계급의 독재가 공산당의 독재임을 인정하고 자칭 인민대중을 위한 사회과학자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이 공산당 자체도 독재로써 지배되고 있다. 소련 2억만 인구중 60만이 공산당원들이다. 그러나 데이빝 달린이 자기 저서 『소련의 정치』란 책에 말하기를 「60만당원을 실제로 만명이 장악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 만명 역시 사상이나 행동이 「크레므린」의 독재자에 의하여 완전히 좌우되고 있다.
이렇게 개인독재제도가 설립됐는데 지금까지 이 권리를 레닌 스탈린 그리고 흐루시초프의 순서로 점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