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 하듯이 주시여 당신을 그렇게 내 영혼이 그리워 하나이다. 내 영혼은 천주를, 생활한 천주를 갈망하나이다. 나는 언제나 가서 천주의 얼굴을 뵈올 수 있으리요』(성영 四二.2…3) 다윗 성왕의 애절한 연모의 글귀입니다.
이 땅 위에는 그렇게 만나보고 싶은 이가 없읍니다. 그 육신이 아니라 그 영혼이 애인이 아닌 천주를 참된 임이라 합니다.
『시온의 딸아 기뻐하며 노래하라. 보라 나는 와서 네 안에 살리라』(자가리아 二.14) 두 믿음이 한 마음으로 합일되어 임을 압니다. 못난이 모든 것을 갖습니다.
이를 흉내 내어 세상 사람들은 사랑의 이야기로 밤도 지새우며 최고급의 연담을가려 죽도록 사랑하마 또는 영원히 변치 말자 언약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너는 너고 나는 나로 나먼지 인생의 황혼길에 정말 외로운 사람으로 났습니다. 석가는 그의 처 「야유타라」의 화려한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토록 향과 분으로 단장하고 비단 옷으로 싸였던 궁녀의 옥빛 결같은 아름다움도 곤한잠 밤에 머리가 베개서 떨어지고 단졸턴 모발은 헝클어지며 입을 헤벌렸는데 침을 지르르 흘리는가 하면 눈곱이 고였고 팔다리가 이불 밖으로 나와 살이 허옇게 드러나는 둥 볼꼴이 아니었읍니다. 사람들은 거짓을 감고 눈을 속인다는 것을 알아채고 석가는 탈속하고 말았읍니다. 어쩌면 중생은 속고 속히고 터무니 없는 바램 속에 한평생 지내지 않습니까? 사람 위해 있는 돈이 돈 때문에 사람이 줄줄이 죽습니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망하기도 합니다. 나도 망하고 너도 망하라는 저주뿐만 아닙니다. 모 처녀는 실연을 하고 죽겠다 하며 모 청년은 무슨 약봉지를 들고와 죽겠다 합니다. 모 부인은 인생을 극도로 비관하다가 나에게 자살의 소문을 던져놓고 살아졌읍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보아야 죽을만한 이유는 되지 않았읍니다. 그런 까닭은 먼저 죽어있는 영혼이었읍니다. 그 육신이 그 영혼을 가혹하게 고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읍니다. 한 말로 자신에 대한 회의가 빚어낸 영신생활의 비관입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열외 심리입니다. 믿음이란 위장이 자신 있게 소화시킬 수 있는 식욕이나 모든 신경작용을 통한 감각적 확답의 결론을 얻는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루의 신앙을 위험한 불위에서 시험하셨읍니다. 욥의 신앙을 죽을가 싶을 정도로 육신의 질병을 가지고 시험하셨읍니다. 모이세의 백성을 사막에서 다루었읍니다.
소도마 고모라, 아다마, 세보잉, 바라 등은 먹고 마시고 음탕함으로 시험에 지고 말았읍니다. 원조 아담 에와 그리고 아브라함 모든 이에게 신앙의 시험이 있었읍니다. 어떻게 자신을 건져낼 수 있읍니까? 도마가 예수 못박힌 흔적을 늑방에 손가락을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노라 한다면 오늘날 우리도 피가 낭자한 예수의 몸을 만져 봐야 믿음을 갖지 않겠읍니까.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신앙엔 물리 화학의 법칙이 통하지 않으며 수학의 공식이 필요 없읍니다. 도비아는 이웃 사람들이 예다보암이 만든 금송아지를 예배하러 갈 때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참배하여 천주를 공경하였읍니다. 세나켈왕이 유다국에게 패배한 앙심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돌려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도비아가 시체를 묻어주고 의복과 음식을 주어 위로한다 하여 도비아를 죽여 재산을 몰수하라 명했읍니다.
그의 정성어린 희생과 애덕 행위에도 불구하고 눈이 멀었읍니다.
그렇지만 옛날의 욥처럼 언제나 천주께 믿음을 두고 감사하였읍니다.
도비아 친구들이 애긍하고 사람을 장사하고 선업을 하며 천주를 위하여 일하였으나 지금 어찌되었나 조롱한데 대하여 도비아는 말합니다.
『끝까지 신앙을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에게 천주 주시는 그의 끝업슨 생명을 기다리고 있는 몸이로라』
바위같이 굳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으니 보지 않고 믿는 자는 진복자로다』(요왕 二O-29)
도마가 에수 부활사 몸을 만져 보는 영광보다 그 이전에 믿음이 더욱 복되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도마 이전의 믿음 상태에 있읍니다.
어린 애기가 제손으로 아무 것이나 위험한것을 줏어 먹기보다는 어머니 손에서 받아먹는 것이 얼마나 안전하고 복된 것입니까? 제눈을 믿는 그 이상으로 예수님을 믿을 것입니다. 『주여 너 누구시오니까?』 『나는 너의 핍박하는 바 예수로라』(종도 九.5)
鄭淳在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