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49) 자동문(自動門)
발행일1962-09-16 [제343호, 4면]
샤르르 수사의 생명은 날이 갈수록 소모되어갔다. 우리들은 신부가 항상 전연 은수자의 관심할 바가 아닌 무수한 사건에 분주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는 은수자의 은둔소와 꼭같은 집에 살고 있으며 또 은수자의 가난한 몸차림을 하고 있기는 하여도 그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만인의 형제인 것이다. 그는 오고가는 모든 「투아레그」인들의 이웃이다.
1913년 3월 그는 또 다시 프랑스에 갔으나 그때에는 「투아레그」인의 젊은 동무 「다그 라리」족의 욱셈 아그 시캇트라는 때때로 「아제크렘」으로 신부를 만나러 오던 천년을 프랑스에 데리고 가기 위해서였다. 그들 두 사람은 수일간을 「마르세이유」에서 보냈으며 그동안 「뽕 다 뭇송」시대의 후꼬오 옛친구 횃쯔 제임스 집에서 식사를 했다.
『성인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고 횃쓰는 말했다.
『그는 대단히 쾌활하며 상대히 재미있다… 그가 옛친구들에 대한 것을 내게 말할 때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즐겁던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으며 나도 역시 마땅히 그러했다. 그는 자기의 술에다 물을 많이 탓다. 그러나 대단히 유쾌한 손님이었다.』
『욱셈은 제 고장의 의상이 매우 어울렸다. 그는 야채를 싫어했으며 양같은 것을 군 고기로 먹으면서 포오크 쓰는 법을 단번에 배워서 능숙해지고 말았다!』
이들 두사람의 여항자는 「마르세이유」를 한바퀴 돌았다. 그들은 「바르비레」에서 마리 드 부릭크의 집과 빠리의 「페르씨에」가에 사는 마리 드 봉디이 집에서 며칠을 묵었다.
수도인 빠리에서는 그들은 구우로오 장군에게 점심 초대를 받았으며 그리고 「몽마르뜨르」의 성심성당에 조배했다. 「리용」에서는 그들은 라페리이느의 손님이었다. 지방에서는 후꼬오의 수많은 친척들에게 초대를 받았다. 그들은 스위스까지 갔다. 왜냐하면 신부는 욱셈에게 눈에 쌓인 경치 좋은 산들을 보여주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샤르르 수사는 무엇이든 모든 것을 욱셈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던것이다. 다만 그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숨겨서는 안되겠다고 생각되어서 친절히 자기가 출생한 세계를 알려주려고 했다.
그것은 그들이 차차로 모든 일을 이해하며 사정을 속까지 통한다음에 판단 할 수가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빠리에서 샤르르 수사는 자기의 회심의 기념으로 생 오오규스땡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또 「카름」교회의 지하성당에서는 1792년에 순교한 자기의 대백부 아르망 후꼬오를 기념하여 미사를 올렸다. 그는 자기의 단체에 대한 아멧트 추기경의 지지를 받으려고 했으나 알현한 뒤에 그다지 열성이 있는듯한 인상을 얻지 못했다. 그는 또 「투아레그」인들을 위해서 병원과 학교를 찾아서 식민과학 아카데미에 갔으나 그의 요청은 거의 반향을 얻지 못했다.
다만 「뷔뷔에」 사는 그의 주교인 보네만이 이번에도 그를 충심으로 환영하며 격려해 주었다. 도중에 샤르르 수사는 알제에 대학 문교부장관인 밧세씨에게 출발하기 전에 마침 완성된 간략 투아레그=프랑스 사전의 원고를 맡겼다. 밧세씨는 즉시 그 출판에 착수하려 했으나 점차로 절박해지는 정세 때문에 그 출판은 1918년에서 20년까지 연기되었다.
그동안에 샤르르 수사가 죽었기 때문에 비로소 이 저작의 권두에 그의 이름을 올리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욱셈과 신부는 1913년 1월에 「타만라셋트」로 돌아갔다. 돌아오자 그는 「투아레그인」과 농민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일반 정세는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았다. 쨍쨍한 날씨가 심해지고 주민들은 극도로 쪼들리는 생활을 하며 겨우 그날그날을 보내는 형편이었다. 이때 또한편으로 「트리폴리」 지방에서는 국경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신부는 또다시 전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어학의 연구에 관해서는 그가 이미 문법과 모티린스키와 같이 완성한 간략사전의 문제는 다 해결이 끝난 때였다.
그것들은 이차적인 일밖에 안되었다. 아직 최대의 일을 완료할 것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즉 투아레그=프랑스의 상해사전 투아레그=프랑스 고유명사사전 투아레그어시와 산문집 투아레그어의 텍스트 및 프랑스어 역 투아레그어의 산문집 투아레그 상해문법. 이와같은 저작을 위해서 그는 타씨이느와 벤 메시스 바 함무우 그밖에 여러 사람들과 협력하여 풍부한 자료를 이미 모아놓았다. 이것을 청서하며 조회하고 과학적으로 배열하는 것 등이 남아있는 일이었다. 신부는 자기의 죽음이 가까워온 것을 예감하여서 더욱 이 일에 골몰하여 열중했다.
그는 55세였으나 전에는 1909년의 대기근때에 피로한 나머지 위험하게 죽게되었을 때가 있었으며 더욱이 그는 비극적인 죽음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투아레그」인의 영혼의 문을 다른 사람에게 활짝 열어주려고 자기가 계획한 노력을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완성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서는 「호가아르」의 사람들이 그의 조정을 쉴새 없이 요구하고 있다.
1914년 1월 페인 지휘관의 후임으로 오아시스지구 총사령관이 된 메이니에 지휘관이 「호가아르」를 공식으로 순회했다. 이것이야말로 대초대연을 베풀 기회였다. 지휘관은 몇명의 「투아레그」 귀족부인과 전사들에게 둘러싸여서 라씨이느와 함께 차를 나눴다.
신부가 통역을 맡아 했다.
7월에는 생레제에 대위가 벤 매시스와 「투아레그」의 낙타기병들을 내방했다. 그들은 「모티린스키」 요색에서 7월 14일의 빠리제(祭)의 축하를 하며 그곳에서 뭇사와 메이니에 지휘관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샤르르 수사는 다만 홀로 「타만라셋트」에 머물렀다. 그는 하루종일을 기구와 그의 위대한 사전 꾸미는 일에 바쳤다. 다음날 메이니에 지휘관은 말했다.
『우리는 엄숙하게 「타만라셋트」의 평야로 들어간 것이다. 그곳에는 「이므라드」(臣家)인 부족들이 보낸 대표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아메노칼에 의하여 내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소집된 것이다. 축하하는 기분으로 떠들석하며 여러가지로 다채로웠다.
그것은 아침에는 빨간 끈으로 만든 고삭풍의 탄약분(彈藥분)이 붉은띠를 옆으로 메고 순백의 장의(長衣)를 입고 정장을 한 낙타기병의 열병과 같은 것이었다. 챙이 달린 빨간모자의 주위로 말아놓은 흰 타아방… 그들의 뒤에는 자기의 소지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식물을 몸에 달고… 청남색의 무거운 상의를 백색 장의 위에 입어서 똑같은 백색으로 맞춘 어깨띠를 걸치고 투구와 같이 똑바로 솟은 머리덥개를 쓰고 싸움하듯이 흥성(關聲)을 높여가며 「투아레그」인들이 작은 말을 달리면서 빠져나가는 것이다.』
『정오에는 유럽인과 토민의 하사관이 연쇠석으로 모였다. 붓사는 나의 왼쪽의 상석을 차지했으며 드 후꼬오 신부는 나의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 메뉴우에 대해서는 특별한 것은 없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요리를 내놓았다. 식사후에 서로 주고받는 우정에 넘친 축배. 아메노칼은 자기가 자진해서 입을 열었다.
그가 그 훌륭한 연설 속에 「대령」(라페리느)의 추억을 말하고 나서 우리는 아메노칼이 결점없는 상류인으로서 창작한 시 일편을 우리에게 읊어주도록 부탁했다.
그 시는 드 후꼬오 신부를 제외하고는 우리들 중 누구 한사람도 알아듣지 못했으나 이국어가 금속적인 음향 악센트가 강한 치음에 의하여 매우 아름답게 들렸으므로 우리는 독창적인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이 매혹되었다.
주둔소의 통역인 벨 아이도 상사가 즉석에서 우리들을 위해서 준 통역은 대단히 훌륭하고 나무랄데가 없었다. 그 시는 뭇사의 유명한 무훈의 하나인 원정과 전후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여성(호가아르에서는 누구 한사람도 모르는 자가 없는)에게로 귀환하는 것에 대하여 읊었던 것이었다.』
이와같이 사막 속에서의 소란한 축제는 단조로운 일상 생활 속에 아주 희소한 일이다. 병사의 간호를 의뢰하려고 혹은 이웃산에서 일어난 분쟁의 조정을 구하려고 혹은 다만 그를 만나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빈번해졌다. 그는 날마다 손님들을 응접하는데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대사전의 노작은 급속도로 진전해갔다. 1914년 8월 31일에는 신부는 505 「페지」까지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