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성지를 향항 행진하는 순례의 의의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교적 순례는 먼저 천주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유데아 백성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하여 에집트와 그 종된 지위를 떠난 것은 약속의 땅의 젖과 꿀을 먹기 위함이 아니오 먼저 젖과 꿀을 그 백성에게 주신 천주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약속의 땅의 상속은 바로 야훼 그 자신이었다. 또 「바빌론」에서 귀향살이 하던 백성이 사막과 초원을 지나 「예루살렘」에 돌아온 것은 성도(聖島)에서 정주하기 위함이 아니오 무엇보다 먼저 조상들의 천주와 새로이 또 더 깊이 지내기 위함이었다. 또한 해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위하여 그들의 가정을 떠나는 것은 아버지 집에서 더 친밀히 천주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우리 신자들은 「루르드」의 복잡한 무리 가운데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 고독 속에서도 천주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의 순례는 모든 구약의 순례와 마찬가지로 무엇보다 먼저 천주를 찾는 한 영혼과 그 영혼에게 새로이 당신을 주시는 천주사이에 있는 개적(個的) 상봉(相逢)일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볼 때 우리가 「새남터」로 가던 「미리내」로 가던 「예루살렘」으로 가던 「루르드」 혹 「샬뜨르」로 가던 상관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천주를 향하여 간다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노력을 하지않는 순례자는 그 목적을 어길 것이다. 「샬뜨르」는 그에게 황홀한 「카테드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마리아의 아들의 집이라고 할 때 그것은 결국 돌이 기묘하게 서로 서로 쌓인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우리의 순례가 잘 조직된 「투리스트」적 (觀光的) 여행에 흘러서 아니되고, 먼저 또 본질적으로 천주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도록 주의를 환기시켜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보아야 한다.
어떤 성지를 향하여 가는 순례는 우리의 일생은 천주를 향하여 나아가는 순례라고 하는 것도 생각케 한다.
우리는 애착과 근심의 쇠사슬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을 잠시 떠난다.
순례의 행진은 『우리는 여기에서는 영원히 머므를 곳을 갖지 못하며 오직 장래의 그곳을 탐구한다.』고 하는 『헤브레아서(書)』 서간의 말씀을 기억케 한다.
끊임없이 날로 날로 우리는 『시온의 산과 생활하신 천주의 도읍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억만의 천사의 무리와 하늘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장자들의 즐거운 회합(會合)에 가까이 가고 있다. 낙원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으나 그런 아직 결코 결정적으로 소유하지 못한 우리 순례자들은 길가에 남아있다.
우리는 『완전』한 성년(成年)과 그리스도의 연세(年歲)의 풍부한 분량에 이르겠금 -가시기를』 기대하면서 계속되는 젊은 속에서 전진한다.
영원한 젊음을 가진 교회도 도중에서 그 영원한 미(美)와 그리스도의 완전한 배필의 그 찬란함을 형성하기를 끄치지 아니한다. 이러한 관계로 신약의 순례는 출애급(出埃及)과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자태를 새롭게 한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백성처럼 그리스도 자신처럼 신자들의 생활은 순례이요 아비 집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아비집이 매우 가깝고 신약의 순례자는 지금부터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 지체하고 있어서는 아니되고 좋지 못한 여관을 지어서도 아니된다.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은 우리가 머물 땅이 아니요 오직 다만 우리가 지나갈 땅이다. (이사야 38,12 성영 38,13 전도서 12,5)
이 순례적 조건은 천주의 것이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온전히 이탈한다는 감정을 우리에게 주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쇠사슬에서 해방되어 아비집으로 가기 위하여 천주께 부착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적 조건의 기쁨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나에게 주의 전당으로 가세 할 때 오 나의 기쁨이여』(성영 121-)
죽음은 천주를 향하여가는 우리의 순례의 마지막 발판에 지나지 아니할 것이다. 우리의 지상순례(地上巡禮)의 상징을 통하지 아니하고 실로 우리가 천주를 만날 수 있는 그 시간이다.
이와같이 모든 순례는 우리의 모든 생활의 요약(要略)이 되어야 한다. 천주를 향하여 인도하는 이 길에서 우리는 고독하지 아니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순례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인간인 그리스도는 우리가 가는 길이오 천주인 그리스도는 우리가 가는 천국이라』고 아오스딩 성인께서 훌륭하게 말씀하셨다. 또 그는 『오 평화의 아들이여 하나이오 공번된 교회의 아들이여 행진하라 행진하면서 노래하라 순례자는 피로를 풀기 위하여 길에서 노래할 것이다. 나는 이 「길」의 이름으로 절원한다. 길에서 노래하라 아무도 날가빠진 항상 같은 노래를 부르지 말고 그대의 고향(天國)의 사랑의 노래를 부르라 새로운 길 새로운 순례자 새로운 노래!』하고 외쳤다.
우리의 순례의 첫 동반자는 그리므로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우리의 둘째 동반자는 우리의 형제들이다. 도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자는 고독하게 걸어갈 수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형제들도 만나기 때문이다. 우리시대에 특히 순례는 그리스도교적 공동체의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특전있는 방법이라 생각된다. 그리스도 안에 한 백성으로 만난다고 하는 사실을 말한다.
어떤 성지를 향하여 다같이 출발하기 위하여 순례자들이 「구룹」을 짤 때 그들은 오로지 단체할인권(割引券)을 얻기 위해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천주를 찬미하고 사랑하기 위하여 모든 형제들의 사랑과 찬미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사실 우리의 형제들과 함께 말하지 아니할 때 아무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비 신자여』 할 자격이 없다.
모든 한 공동체의 순례는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에 있어 교회의 탁월한 상징이다. 그러면 순례의 그리스도교적 의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새남터」나 「미리내」나 「루르드」나 「샬뜨르」나 혹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먼저 무엇보다 천주께로 「야훼」의 산으로 가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 중 하나인 이사야의 순례의 이 감탄한 노래는 말한다. 『너희는 축일을 걸구히 지내는 밤처럼 노래를 부르리라. 또 이스라엘의 바위께로 향하여 「야훼」의 산으로 가려고 피리에 맞추어 행진하는 자처럼 마음의 기쁨이 있으리라. 북들과 거문고들과 너울너울 노래춤에 맞추어 (이사야 30 · 29 ·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