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仰(신앙)과 作品活動(작품활동)
발행일1963-04-21 [제371호, 4면]
가톨릭 학자·문인 및 문화관계인은 금조(金鳥)같으니 그들은 교회의 영광인 때문이다. =성 암브로시오 이 말에는 오히려 큰 채찍을 가해주는 바도 있다. 이 땅에서와 같이 그 정화(精華)를 들어보지 못하고 있음에 있어서랴. 그러나 가톨릭 문화인들이 항용 말하듯 최종적 「신(神)에의 귀의(歸依)」란 것을 현실(作品)에 좀 더 살려달라는 것은 작금에 생긴 말이 아니다. 최종적인 것은 실상은 쉽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보다 일상생활에 마치 영양을 섭취하듯, 신앙을 견고히 단련시켜 가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거기 난관이 있고 또 그 관건은 다만 같로릭문화인 수중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산만한 질문이긴 하지만 이미 한국 문단에 확고한 지반을 가지고 있는 몇몇 가톨릭문인 앞으로 이런 청탁을 할 수 있음을 기꺼이 생각한다.
앞으로는 「세미나르」 또는 「씸포지움」 등으로 확실한 문제를 설치하고 깊이 파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다음은 문제의 제시라기보다, 소개에 뜻을 두고 있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設問]
①본명은 무엇이며 언제 영세했읍니까?
②가톨릭 문인 「구룹」을 만들 필요가 있겠읍니까?
③작품활동, 대표작과 좋아하시는 작가를 말씀해 주십시요.
④가톨리시즘에 반대되는 문학사조는?
⑤신앙생활이 작품활동에 어떻게 영향을 줍니까?
⑥가톨릭 문인으로서의 신조는?
■ 文人 구룹 만들었으면 / 李瑞求
①요셉 1951년 12월12일.
②만들고 싶습니다.
③30대까지는 극작을 했으나 어느틈에 방송극에 전념하기에 이르렀읍니다. 희곡으로는 「어머니의 힘」 방송극으로는 「망부석」인가 싶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박종화(月탄 朴鍾和)씨
④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⑤역사극을 쓰면 반드시 불교가 나와서 몹시 망설입니다. 그러나 담담하게 다루고 있읍니다.
⑥문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내 인생마저 언재나 천주님의 너그러우시고 따뜻한 그늘 아래에서 생을 누리고 있읍니다. 때로는 자녀들이 계율(戒律)에서 벗어나는 일이 있어 마음 아프다 막을 수 없을 때는 눈을 감고 신공을 드립니다.
■ 瀆神보다 無關心이 問題 / 韓戍淑
①본명 글라라 1954년 영세.
②만들어도 좋습니다.
③「감정이 있는 深淵」 「月운」 「그대로의 잠을」 토마스.만, 한스.가롯사
④독신(瀆神)은 오히려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만 요즘은 철저한 무관심으로 신의 존재조차를 부정하는 것 같습니다.
⑤여태까지는 작품을 쓸 때는 신앙생활을 그리 고려하지 않고 썼읍니다.
⑥종교를 주제로 하지 않더라도 궁극적인 긍정으로써 신에의 귀의를 표현하고 싶습니다.
■ 文學思潮는 波濤같아 / 崔要安
①본명 요안 전 봄 부활제 때인데 확실한 년월일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②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친목을 도모하고 의견도 교환하는 의미에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③대표작을 내세우라면 매우 곤란을 느낍니다. 방송 작품으로서 남들이 추거(推去)하는 것은 「느티나무 있는 언덕」 「그대 목소리」 「오페렛타 춘향전」 등이 있는데, 내 자신은 그것들 보다는 「내 가슴에 불을 켜고」라는 작품에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소설에 있어서도 몇몇 묻혀 있는 작품 중에 내가 애쓴 것들이 있읍니다. 좋아하는 작가로서는 국내에도 몇 사람 있지만, 나딴에 이유가 있어 말하고 싶지 않으며 외국 작가로서 생존해 있는 사람 중에서는 스타인 백과 헤밍웨이를 비교적 애독하고 있읍니다.
④모든 작품이 꼭 어떤 종교적 신앙을 밑받침하고 있어야 한다는 이유는 없겠지요. 문학사조는 파도와 같이 엎치락 뒷치락하는 것이니 여러 형태의 흐름이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고 싶습니다.
⑤너무 의식적으로 조화(調和)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 자신의 인간성과 생활 속에 신앙이 용해되어 울어나야 참된 것이지 떼어다 갖다 붙인 것 같은 것은 냄새가 나서 역효과가 날 것입니다.
⑥내 자신 아직 신앙에 투철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큰소리는 못하겠읍니다.
■ 옳은 價値觀서 過誤 없는 作品 나와 / 金南祚
①본명 마리아 막다레나 1955년 5월 영세
②별로 그런 생각을 가져본 일이 없읍니다.
③첫 시집 「목숨」 이후부터 치면 12·3년이 되고 소위 대표작에 대해선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생각해볼까 합니다. 좋와하는 시인은 인도의 타골입니다.
④어떠한 문학사조라도 철저히 그 저류까지 내려가면 인간으로서의 허탈감과 신에의 규환(叫喚)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오랜 너그러운 기다림을 통해 마침내는 모든 것을 다 귀의(歸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⑤신앙의 빈곤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신앙의 심도(深到) 그만큼은 저절로 작품 속에 그 은혜와 빛을 투영해 줄 것으로 믿습니다. 때문에 인위적으로 어느 결과를 계산할 까닭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⑥옳은 가치관을 갖고 사물을 보아야 한다는 책임을 느낍니다. 말로써 설명하는 지식으로서가 아니고 몸에 밴 행동으로 그 가르침을 익히는데만 생활과 작품이 과오를 면하고 정복(靜福)된 자기 확립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