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기까지 (22) 再會(재회) ⑤
발행일1963-04-21 [제371호, 4면]
인상이가 영세 예비를 하고있는 것을 알게된 수련이는 비로소 옴추렸던 마음을 풀었다. (천주교의 교리를 배운다면 한평생 오직 한남편을 지키고 섬겨야 한다는 엄숙한 계율도 알고 있을 것이니 지금의 인상이의 마음은 맑고 개운하리라)는 믿음이 생긴 까닭이다. 비록 영세는 채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수련이 자기의 심경을 미루어 추측할 때 지금 인상이의 가슴은 이미 영세 견진까지 치룬 교우보다 한곱 뜨겁고 독실할 것으로 가득차 있으리라고 믿어졌다.
이것은 누구나 예비에 열중할 때 한 번씩 경험하는 일이다. 방사도 받지 못한 묵주를 받들어 손에 쥐고 그것이 어찌나 대견하고 성스러운지 공연히 마음이 황홀하여 아무도 모르게 몇번이고 성호를 그어보기도 한다.
생각하면 수련이고 인상이고 아직도 천주교인이 되려는 과정에 있는 처지었지만 천주님을 흠숭하고 계율을 엄숙하게 지키려는 마음은 이미 불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평생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천주교를 믿는다하면 그저 무조건 반기고 믿고 싶은 수련이로서 인상이가 예비를 한다는 말을 듣고 다시는 그를 경계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든 것은 숫제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인상이의 얼굴에는 그늘이 거치고 맑은 빛이 에돌고 있다.
그렇게 심각하던 표정은 씻은듯 걷히고 으젓하고 조신한 딴사람이 된 것이다.
『아-니 어느 틈에 천주교에 입교하실 생각을 하셨어요』
수련이는 진심으로 믿었다.
『모두가 미남이의 덕입니다.』
『뭐요 미남이 덕이라니요』
『미남이가 들고 다니는 교리책을 얻어읽다가 입교할 생각이 들었거든요』
『교리책 어느 대문에서 깨달으셨죠』
『교리책에서가 아니라 요사이는 신부님을 늘 찾아가 뵙고 회장님께 직접 배우고 있거든요…』
듣고보니 숫제 먼저 시작한 수련이보다 인상이가 한걸음 앞선 편이다.
『정말 강복 받으실거야요. 어디를 가시든지 무슨 사업을 하시든지 반드시 행복하실거야요』
『고맙습니다.』
인상이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어머, 고맙긴……』
수련이는 말이 맥혔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수련이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이상한 일이다. 인상이 앞에서 눈물을 흘리다니 생각지도 않던 일이다. 인상이와 자기와 이렇듯이 마음터놓고 진심으로 서로 축복하고 염려해주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것이 도무지 누구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일까 서로가 한겹씩 꺼풀을 쓰고 노려보고 넘겨보던 사이가 아니였던가. 이렇게 활짝 터놓고 오손도손 이야기 할 수 있는 길을 과연 그 누구가 터주었을까. 사람의 힘으로는 이루지 못할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지내든 알고 지내든 그 힘은 언제나 엄연히 빛을 발하고 있다. 수련이는 지금 그 힘을 똑똑히 느꼈다. 묵주를 쥐고 있는 인상이의 손가락 사이에서 그 빛을 엿보았다.
『어쨌든 하루 더 생각해 보고 곧 대답하겠어요』
수련이의 음성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불안도 의심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말씨를 되찾은 것이다.
『농장이야 참 쓸모 있고 아담하지.』
옆에서 어머니가 은근히 부축였다.
『농장 시세는 동리 노인네 몇분에게 일임해서 그분네가 정해주시는 가격보다 더 싸게라도 처드릴 것이니 어쨌든 맡아주세요. 주택 설계는 아마 수련씨 취미에도 알맞을 거야요. 한 번 들러보세요』
인상이는 서글픈 미소를 띄었다. 주택 설계를 할 때 - 인상이는 수련이와 같이 거주할 것을 예상하고 머리를 썼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제는 수련이와 둘이서가 아니라 인상이는 제주도로 물러가는 마당에 인상이의 가슴이 편할리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무던히 참고 침착 냉정히 버티고 있는 인상이의 태도는 수련이를 위압했다.
『달라졌어! 참 훌륭해』
소리가 수련이 가슴에서 용솟음 쳤다.
『잘 알았어요. 나중 일은 어머님과 상의해서 추진하겠어요』
수련이는 결론을 이렇게 내렸다.
『그럼 내일 다시 뵙겠어요』
인상이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맑은 바닦같이 돌아가버렸다.
『어떠냐 인상이가 저렇게 변한게 다 뉘 덕이겠니. 성당 회장님이 몇차례 찾아가 전교를 하시더니 얼마 동안에 저렇게 달라졌어!』
어머니는 자기 자랑같이 크게 떠들었다.
이날밤 수련이는 어머니와 미남이와 셋이서 잠자리에 들었다.
『이애 자기 전에 만과나 드리자』
『어머니 나는 만과를 어떻게 드리는지 아직 몰라』
『엄마는 나하는대로만 해』
미남이가 선배인체 으시댔다. 아닌게 아니라 수련이는 미남이 하는대로 따를 수밖엔 없다. 아는 것은 성호 긋는것 뿐이다.
벽에는 적으나마 야광(夜光)이 은은한 고상이 이미 걸려있었다.
『이거… 내 대부 설 청년회장님이 주신거야요.』
미남이는 또 한 번 우쭐했다.
『방사까지 받은 거라서 아주 곱게 높이 모셔야 한대요.』
미남이는 완전히 어머니를 가르치는 위치에 이르럿다. 수련이는 그것이 몹시 대견했다. 자랑하고 싶었다.
『우리는 성세도 받지 못한 예비자인데 이렇게 모두… 너무 지나치지 않아』
수련이는 넌짓이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교리반에 나갔을 때 물어봤단다. 그랬더니 각자가 자기 정성껏 천주님을 흠숭하려는 생각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구 그러더라』
밤은 깊어 가건만 고상 앞에 무릎 꿇은 세 식구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튿날 아침-수련이는 다시 서울로 갔다. 우선 인상이의 농장을 사려면 은행에 맡긴 돈을 찾아야 한다. 영천 집에 가서 짐도 꾸려서 안양으로 부쳐야 한다. 성모병원에 가서 진영이에게도 일단 경과보고와 아울러 작별도 해두는게 좋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보이호텔에 들러서 안명철이에게 우선 안양에 가서 지내려는 설계를 알려주어야 했다.
『엄마! 얼른와! 오늘 밤까지 오지』
미남이가 미리 다짐을 받으려 했다.
『그럼 오다마다!』
수련이의 대답은 간단하였으나 실은 그렇지도 않았다. 두통거리가 진영이다. 진영이는 찾아가지 않을수도 없고 찾아만 가면 좀처럼 헤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샘 많고 괴벽스러운 진영이가 인사만 받고 그냥 보낼리가 없다. 돈 얘기 아버지는 언제 오느냐… 나중에 가서는, 돈 좀 꿔라고 조를 것이 분명하다. 만일에 돈을 꿔어주지 않으면 당장에 중상모략이, 터져나올 것이다.
수련이는 싫으나 좋으나 서울에 도착하는 길로 우선 성모병원에 들렀다. 면회시간이 아니라서 좀 안됐지만 몰래 살그머니 층계로 기어올라갔다. 육층은 조용했다. 층계를 올라서니 마침 진영이는 복도에 나와서 유리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니 나와도 괜찮아』
수련이는 진영이의 어깨를 잡았다.
『너 참 잘 왔다. 너 돈 많이 생겼지. 나 좀 꾸어주어. 선열은 내렸으나 좀 더 있어야 한대. 내일이 토요일야 병원비 낼 돈이 없어』
과연 진영이 다웠다. 만나는 즉시로 돈타령이다.
『아-니 누가 그래 내가 무슨 돈이 많이 생겨…』
수련이는 일단 진영이 입을 막았다.
『다- 알고 있어. 그러지 말고 어서 돈 좀 주어. 내 얼른 퇴원해서 그놈 홍창식의 멱살을 잡고라도 두둑히 받아낼께…』
수련이는 미리 짐작하고 왔는지라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영이의 신세가 몹시 가엾었다. 진영이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생각과 행실부터 고쳐야 할 것이다.
(이 가엾은 영니에게 율 바르게 살 길을 열어주는 길은 없겠는가)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천주교 운운했댔자 진영이 귀에 들어갈 상싶지 않았다. 그것은 먼훗날을 기약하는 수밖엔 없다고 판단했다.
『이번 주일 입원비는 있다가 오후에 병원에다 직접 내줄께 염려말어』
『그래 좀 그래주어 정말 고맙다』
진영이는 몹시 다급했던지 즉각 얼굴빛을 고치고 수련이의 손목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