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신부 비안네는 이따금씩 농담으로 사람들을 잘 웃기십니다. 「아르스」의 소학 교장인 아다나시오 수사가 마차로 여행해서 돌아오는 도중 말이 길을 벗어나서 도랑애 빠진 이야기를 합니다. 성 비안네는 『거 참 안됐어요』 말하고 이어 하는 말이 『성 안또니오는 결코 차에서 떨어지지 않었어요 이 성인처럼 했으면 좋았을걸요』 신부님 성 안또니오는 어떻게 하셨읍니까? 대답은 이러합니다. 『언제나 걸어다녔지요.』 한시간의 지루한 설교보다 풍성한 훈계가 있지 않습니까? 유모아의 성인 토마스모아를 만나면 아무리 슬퍼하는 사람일찌라도 그를 만나면 심정이 변한다 합니다. 국왕 헨리 8세의 보좌까지 되었지만 그때 왕응ㄴ 이년간 같이살던 왕비를 버리고 안나.보렌을 취하고자 토마스의 찬성을 얻으려 했으나 불의 앞에 칼날같은 토마스는 완강히 이를 거부하여 마침내 영어의 몸이되고 말았읍니다. 왕은 그의 의지를 꺾을수가 없어 1535년 7월1일 드디어 사형선고를 내렸읍니다. 그는 사형집행인에게 정중한 부탁을 합니다. 『-멋있게 잘 자라주오』 칼을 내려 치려는 순간- 『잠간만! 칼을 내려 칠 때 이 수염은 다치지 말도록, 이것은 반역죄에 아무 관계 없오』 댕강 목은 잘리고, 번잡한 「런던」 다리 위에 등불처럼 매달렸읍니다. 『왕이여 폐하를 위하여는 일체를 바칩니다. 허나 단 한 가지 내 양심만은 바칠 수 없읍니다』
대의를 위해 초로의 목숨은 숨졌읍니다. 여기에 무슨 걱정 있읍니까? 우울한 성인은 없읍니다. 감격합니다. 기뻐합니다. 찬미합니다.
예수님은 돌맹이 하나 없이 모래 위에 글쓰시던 손구락으로 간음한 여인을 되살려 보내십니다. 죽은 나자로에게 『우리 벗 나자로가 자는도다 나가서 저의 잠을 깨우리라』 힘에 겨운 수고가 아닙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기 보다 어렵다』
부자에게는 기막힌 사형선고같은 말씀입니다. 예수 세상을 구속하시는덴 살아서가 아니라 죽음으로써 이룩하셨읍니다. 예수님은 비유없이 말씀하시지 않지만 그 비유속엔 무궁한 교리와 우리의 나아갈 길이 명시되어 있고 역설의 타당성이 빈틈 없읍니다.
잃어버린 한마리 양의 비유,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 잃어벌니 아들의 비유 등 끝장에는 잃은 것을 찾아 기쁨에 넘치는 이치를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여기엔 비유 이상의 엄위한 현실 앞에 우리의 얼 속에 구비치는 외침이 있읍니다. 「나는 착한 목자로다」(요왕 10·11) 오늘 주일 복음의 요지입니다. 임금은 나라 백성이 있어야하고 부모는 낳은 자녀가 있고 스승은 제자가 있음같이 목자 없는 양 없다면 양 없는 목자 또한 있을 수 없읍니다. 양은 순진한 짐승입니다. 암닭 품에 안기는 병아리떼들의 포근한 모습을 사람들은 그 얼마나 동경합니까? 양때들에겐 목자가 가장 믿음직한 존재입니다. 마치 모자간의 신뢰쯤 될 것입니다. 들판에 사나운 짐승들을 막아주는 파수요 살찐 초원으로 이끌어 배불리는 의무를 목자는 자기의 이익을 초월하여 충실히 이행합니다. 길가 망홀 뚜껑을 벗겨팔아 자시는데 그 화로 그 망홀에 실족하여 죽는 예가 많습니다. 더 크기는 나라 백성을 위한다 합시고 부정정치로 백성을 도탄에 떨구는 일인독재의 영화와 그의 종말을 보았읍니다. 남편이 아내 목을 졸라 죽입니다.
열달 되면 모태서 나와 우는 생명인데 그전 아홉달에, 여덟달에, 쭉 거스려 올라가 잉태순간에 영혼이 깃든 그 태중 영아를 의사들은 짐꾸러미 노끈을 잘라내듯이 싹독싹독 잘라주고서는 태아 죽인 값의 청구서를 내놓습니다.
그 모든 것이 선항 정치도, 인술도, 의리도 정의도 아닙니다. 망할 징조올시다. 자살하고 죽이고 산아제한하고 하여 무엇이 남겠읍니까? 이런 사회가 우리를 둘러싸고 이런 악독이 우리를 침해하려합니다.
그 틈바퀴에 나는 무엇입니까? 한마리 길 잃은 양이라 합시다. 집단으로는 목자 잃은 양데들이라 합시다. 임자 없는 물건은 누군가 주어갈 것이고, 임자 없는 짐승은 누구에게 잡히기가 마련입니다. 인생은 유모아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유모아는 희극도 비극도 아닙니다. 매정한 사회에서 일루의 희망을 두고 산다는 것은 마치 이른 아침에 양의 우리의 문을 열어 들판으로 이끌어 주는 목자의 기동을 기다리는 양떼같은 겁니다. 양의 생명은 목자의 손아귀에 있고, 양은 목자가 불러주는 피리 소리를 말씨보다 더 잘 알아 차립니다. 목자를 때리면 양떼들은 흩어집니다. 흩어진 양떼를 목자는 불러 모읍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목자와 양을 비유합니다. 원수가 덤비면 자기 양을 위하여 생명을 버릴지라도 목자는 양을 버리지 않읍니다. 과연 모든 것을 다 버린다해도 생명 이상의 것을 버릴 수는 없읍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찾아주시고자 당신의 생명을 기꺼히 버렸읍니다. 우리는 착한 목자의 시야에 있는 한 안전할 것입니다. -어디로 갈 것입니까? 저 푸른 대지 위에 목자는 부릅니다.
鄭淳在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