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50) 戰爭(전쟁)
발행일1962-09-23 [제344호, 4면]
한달후 1914년 9월 3일 「호가아르」의 사람들은 선전포고를 안게 되었다.
샤르르 수사는 격심한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스트라스부우르」와 「난시이」에 대하여 혹은 전쟁에 몸을 던진 수백만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전장을 향하여 출발할 것을 꿈꾸었다.
그는 옛친구들이 전부 포화속에서 사라지며 목숨을 바치고 있는 이때에 아직도 『은둔생활을 하며 안전하게』 살고 있는 것에 마음을 찌져내는듯 했기 때문에 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의 연령은 동원 연령을 넘어섰으며 또 교회의 규칙은 성직자의 참전을 허가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전선에 있는 라페리이느 또한 그에게 아프리카에 머물러 있도록 요청하고 있었다.
「호가아르」는 평온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식량사정은 험악하게 되었다. 또 쨍쨍한 날씨가 계속되어서 절반이 사멸할 지경이었다.
유목민의 대부분은 가축을 끌고 보다 나은 방목지가 있는 「아드라아르」로 향해서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돌연 불안한 정보가 들어왔다. 그것은 모록코쪽의 습격에 의하여 뭇사가 「아드라아르」에서 포로가 될번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험한 찰라에 피하여 아메노칼은 60명의 병사를 모아서 적을 추격했다. 그는 한주먹에 될만한 약간의 낙타기병으로서 지원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타만라셋트」의 은둔소에서는 샤르르 수사가 너무 과로를 했기 때문에 기진맥진해 있었다. 너무나 조식을 했으므로 괴혈병에 걸려서 고열이 나고 호흡곤란에 빠지고 말았다. 1915년 초기에는 그의 건강은 매우 좋아졌으나 일반정세는 대단히 악화해졌다.
세느시스교도들이 「랏트」와 「라다메스」를 점령하여 「켈 아제에르 투아레그」족의 상당수가 그것에 합류했다. 「아드라아르」에서도 모록코인의 습격이 빈번해졌다.
그들의 습격은 드디어 그 도수가 늘어서 대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메노칼은 수병(手兵)을 80명밖에 갖지 못햇으나 모록코인의 습격은 그때마다 몇백명으로 되어 있었다. 「티디켈트」의 낙타기병은 위급할 때는 뭇사를 원군하기 위해서 이 지역을 초개하고 있었으나 그들도 많은 수는 아니었다. 그리고 군의 경리부에서는 그들의 봉급을 대단히 늦게 지불했으며 질이 나쁜 탄약을 공급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우려되는 상태였다.
또다시 「다이독크」족은 「캘 아하가아르」족의 낙타를 뺐기 시작했다. 「세느시스」교파의 은수자들은 자기편으로 뭇사를 끌어올려고 애썼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뭇사가 이끌고 있는 「투아레그」들의 어떤 사람들은 팃트 전쟁의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다. 신부는 할 수 있으면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도와주려고 온 힘을 바쳐서 설득하는데 힘썼다. 그러나 그것이 이해되기까지에는 거리가 멀었다. 그동안에도 그는 자기 은둔소를 떠나지 않고 매우 열심히 사전만들기에 골몰하였기 때문에 1915년 7월에는 최후의 2028 「페이지」를 쓰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가장 방대한 노작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이 일에 옮기기까지 그는 이 지방의 가장 침착한 가정의 개선을 지도했다.
『트리콧트 편물도 레에스 편물도 매우 잘합니다. 모든 사람이 편물을 짜기 시작하여 여자들은 두가지를 다 할줄 알게되어 조끼를 짜는 젊은 사람들은 상당히 잘짜게 됐읍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바눌도 털실도 면사도 없읍니다. 만일 당신이 이러한 것들을 보내주시고 또 뷜모랭을 통해서 약간의 면화 종자를 보내주신다면 그것은 이 지방에 크나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이와같은 일은 오로지 정신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그는 마리 드 봉디에게 편지를 보냈다.
한편으로 전보라도 격심한 습격이 계속되고 있었다. 남부 모록코인 「아드라아르」에서 「이포라스」족과 「캘 아파가아르」족에게서 수백두의 낙타를 약탈했다. 그러나 그중의 5분의4가 「호가아르」에서 굶어죽었다.
「아제에에르」에서도 마찬가지였으나 그밖에 이곳에 사는 「켈 아하가아르」족은 세누시스 교파의 선전으로 쉴새없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신부는 이 지방에 대한 모든 정보를 자세히 말한 편지를 듈클로스 대위에게 보냈다. 그는 편지에다 낙타의 징발을 너무 번번히 하지 말도록 수당을 되도록이면 신속히 그리고 바르게 지급해 주도록 원주민들을 위해서 중간 역할을 해주었다.
그는 모든 사소한 문제에까지 파고들었다. 자기의 은둔소를 쩌나지 않아도 그는 모든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모든 곤란을 예견하였으며 또 모록코 시대와 같이 그것을 조정함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바르게 말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샤르르 수사는 한 은수자로서가 아니라 만인의 형제로서 활약했던 것이다. 그는 싸우기 위하여 온 것도 아니였으며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온 것도 아니었다. 모든 사람과 「호가아르」의 평화를 침범한 사건에 대하여 말했고 공공이 복지를 위해서 여러가지 충고의 말을 했던 것이다.
이당시 「호가아르」 주변의 전쟁소동과 쌓이고 쌓인 비극적 정보 등이 완전히 생활을 덮어싸워논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샤르르 수사의 생활도 이와같은 일로 인하여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참으로 「타만라셋트」에서 살기 시작한 후로 그의 생애의 최후의 몇년간은 전에 나자렡에서 그가 그만치 노력한 영적 저서를 신부는 어느새 거의 전부 없애버리고 말았다.
지금이야말로 자기 스스로 어떠한 순간에도 지금까지 스스로 살려고 하던 것을 실제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전란 속에서도 나자렛에서 지낸 것과 마찬가지로 천주께 대한 평화의 신비를 명상했던 것이다.
동년 전란의 폭풍이 「트리폴리」 지방에서 폭발했다. 3월 6일 「디아너」의 샤를데 요색이 별안간에 1천여명이나 되는 세누시스트교도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이 소수비대로 3월 24일까지 격심한 저항을 했으나 격파되고 물을 뺏겨서 괴멸되고 말았던 것이다. 전란은 이렇게 확대되었다. 「아이르」의 「이우리민덴 투아레그」족은 「세느시스」교도와 결탁하여 뭇사를 몇차례나 자기 수중에 넣으려고 불렀으나 뭇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의 병참부에서는 항상 조악한 탄약을 그에게 주어서 번번히 낙타의 징발을 행해도 보상금의 지불도 항상 연체되었다.
신부는 또 이와같은 사태에 대해서 항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편에선 「이우리민덴」족에게 대항할 낙타기병들을 보강하기 위해서 40명의 병사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은 뭇사는 그 요청을 훨씬 지난 2배의 병사를 보냈던 것이다.
다만 그는 「쿠디아」에 남겨둔 특히 「다그 라리」족으로만 구성된 병사들을 그대로 두어달라고 탄원했다. 왜냐하면 이 병사들은 덴트, 다시말하면 여자 노인 어린이들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신부는 「켈 아하가아르」족의 일부는 항상 「세느시스」족과 「이우리민덴」족에게 합류하려고 원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를 본 뭇사는 최후의 승리는 우리에게 있다고 확신한다』고 신부는 듀틀로에게 써서 보냈다. 『총명한 종족의 추장들 「다르라리」의 추장인 욱셈과 같은 추장들도 같은 추론을 하고 있다. 즉 그들은 우리들의 결국 승리를 얻을 것을 믿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보존하려고 한다. 그들이 무엇보다 원하고 있는 것은 평화와 안전인 것이다. 「켈 하아가아르」족은 우리를 경애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들은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느시스교도들도 또한 귿르에게는 이방인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알고 있으며 우리의 정체가 참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조금후인 1916년 5월말에는 일반 정보는 매우 좋아졌다. 듀클로 대위는 「리아네」를 다시 찾고 메이니에 지휘관은 「아레에르」족과 「세느시스」교도들을 국경까지 격퇴하였다.
그러나 「티디켈트」 사람들은 모든 프랑스군의 주류지에서 멀리 떨어졌으며 「켈 아하가아르」족의 거주지에서까지도 떨어져 있는 「타만라셋트」에 혼자 남은 신부를 우려하고 있다. 모티린스키이 요색을 지휘하는 콘스탕트 중위는 신부의 보호를 호소했다.
「타만라셋트」에서 신부는 농민들의 옆에 있었으며 그리고 그 장소에서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투아래그」인들은 그를 만날 수가 있었다.
신부는 그 마을을 떠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타만라셋트」에서 볼쥬 즉 「세느시스」교도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에는 농민들과 함께 그곳에 들어가서 숨을 수 있는 작은 굴을 만들자는 생각을 찬성하고 있었다. 선택한 그 건설지는 주로 오두막집에서 수백메타 떨어진 하천의 서편언덕에 「후리케에트」함에 1킬로 떨어진 오른편 언덕에 있었다.
신부는 1916년의 최초 육개월간은 스스로 포율 암바레크와 5·6의 농민들과 함께 건설하는 일에 착수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