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氏王室(이씨왕실)의 天主敎(천주교)와의 關係(관계)
先代(선대)는 迫害(박해)했고 後孫(후손)은 거의 入校(입교)
兩班層(양반층) 먼저 入校(입교)
昭顯世子(소현세자) 北京(북경)서 배워
지난 5월 27일자 「경향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일본 동경에 거주하고 있는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이 교우인 친지의 감화로 병상에서 대세(代洗)를 받음으로써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한다.
그의 대세일자와 본명 및 대부 등은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그의 소속성당인 일본 「도오꾜」(大田區田園調市)성당의 나까다(中田藤太郞) 신부도 그의 영세사실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고 전한다. 이와같이 영신적으로 영생을 얻게된 이은이 독립을 도루 찾게된 조국으로 오래지 않아 20년만에 돌아온다 하니 이러한 때에 즈음하여 그를 중심으로 한 이씨왕족의 천주교와의 관계를 살펴봄도 뜻있는 일이라 하겠다.
(1)
이씨조선은 건국과 더불어 과거 천여년동안 민족의 신앙생활을 지배하여 오던 불교를 극도로 탄압하는 한편 조상의 제사만을 강요하는 주자학(朱子學)으로서 지도이념을 삼게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의 신앙생활은 일월 산천토지 등을 숭배하는 것과 같은 원시적 상태로 돌아가게 되고 이정자들은 혈족(血族) 중심으로 당파를 조성하여 동족상잔의 참사만을 거듭 일으키게 되었다.
이러한데에 덧붙여 건국후 2백년부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닥쳐오게 되니 국민으로서 뜻있는 사람들은 때마침 북경(北京)으로부터 전래되고 있던 천주교 사상에서 참된 인생의 의의를 찾고자 하였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특히 왕족으로서 가장 먼저 천주교와 관계를 맺게된 사람은 16대 왕이던 인조(仁祖)의 세자(世子)로서 병자호란때(1637)에 호족(胡族)에게 잡히어 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이었다.
그는 만주 심양(=奉天)에서 8년간 인질(人質)의 고생살이를 하다가 명(明)의 서울이던 북경(北京)이 함락됨에 따라 청 세조(淸 世祖)의 뒤를 따라 1644년 9월에는 그곳으로 옮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때마침 그곳에서는 독일인 신부이던 아담 샬(湯若望) 등이 천문대장(天文臺長)을 지내면서 열심히 전교한 결과 황태후 · 황후를 비롯하여 명의 황실관계자만도 2백여명이 천주교를 믿고 있다가 그 대부분이 청군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여기서 소현세자와 아담 샬 신부는 두달동안 서로 깊이 사귀게 되었는데 신부는 특히 세자를 통하여 조선에 전교할 생각을 갖게되었다. 그렇기에 신부는 세자가 청세조의 허락을 얻어 그해 11월 26일에 귀국의 길에 오르게 되자 세자로 하여금 명황실(明皇室)의 교인환관(敎人宦官)이던 이방조(李邦詔) 등 5인과 여러 교인궁녀(敎人宮女)를 거느리고 서양학술에 관한 서적 등을 가지고 귀국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세자는 1645년 2월 28일에 서울로 돌아와 명황실의 교인들로 하여금 왕궁에 머물러 살게 하였으나 세자는 귀국후 불과 70일인 4월 17일에 갑자기 학질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따라서 세자가 가져온 물건들은 불길하다 하여 불사라버리게 되고 명황실의 교인들은 6개월동안 조선궁중생활을 하다가 7월에는 청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와같은 천주교는 정식으로 조선에 전래되기에 앞서 이미 이조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데 이러한 일은 남인(南人)학자들의 자발적인 교리연구의 결과로 조선천주교회가 창설된 1785년 이후에 있어서도 자주 있게 되었다.
조선천주교회가 창설된 것은 학관(學官)을 좋아하던 정조 9년의 일이었는데 다음해 12월에는 홍국영(洪國榮)이 왕의 서제(庶弟)이던 은언군(恩彦君)의 장자 상계군(常溪君)을 왕위계승자로 삼으려 하다가 실패하고 도리어 상계군은 사형을 받게하고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되게 하였다. 따라서 그후 은언군의 아내이던 송씨부인(宋氏婦人)은 홀로 서울 폐궁 경희궁(慶熙宮)에서 과부생활을 하고 있게되니 1791년경부터는 어떤 여교인이 그들을 찾아가서 천주교의 복음을 들려주기 시작하였다. 그러던중 1795년에 중국인신부 주(周文謀)가 입국하여 그 폐궁 부근에 살던 양반집 과부 골롬바 강(姜完淑)의 집에 머무르게 되니 강(姜完淑)은 신부를 모시고 그 폐궁으로 가서 이 두 여인에게 각각 마리아라는 교명으로 성세를 주게하였다.
그후 이 두 부인은 전교단체이던 명도회(明道會)에까지 들아가 복음전파에 힘쓴 결과 그 비녀(婢女)들까지도 입교케 하였다.
그러던중 1801년에 신유대교난(辛酉大敎難)이 일어나게 되니 마리아 송과 마리아 신은 동년 3월 16일에 사약을 마시고 순교하게 되며 교인이 아니었던 은언군도 동 5월 29일에 같은 방법으로 강화도에서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동5월 23일에는 궁녀 수산나 강경복(姜景福) 비비아나 문영인(文榮仁)이 서울 서소문(西小門)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斬首刑)을 받게되었다.
한편 동년 12월 26일에는 서울에서 가오로 이(李慶道)가 동 12월 28일에는 전주에서 누갈다 이(李柳姬)가 순교하였는데 이들은 이씨왕조 제3대왕 태종(太宗)의 아들인 경녕군 비(敬寧君 비)의 12대 후손으로서 남매이었다.
그러고 이경도의 아우이던 바오로 이(李慶邊)는 1827년 5월 5일에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그후 1839년에 일어난 기해교난(己亥敎難)에 있어서도 3명의 궁녀가 서울에서 순교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동년 5월 26일에 순교한 아가다 김(金敬俠) 유리다 김이었다.
(2)
이상의 사실로서 한국천주교회는 창설시부터 이씨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다시 1849년에는 앞서 순교한 마리아 송의 친손인 철종(哲宗)이 제25대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따라서 철종이 왕위에 있던 14년동안에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그리 없었다.
바로 이때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의 증조부인 남정군 구(南廷君 球)가 앞서 강화도에서 사형된 은언군의 아우인 은신군(恩信君)의 양자로 되어 이하응(李昰應)이라는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하응은 민씨(閔氏)부인과의 사이에 3남1녀를 두고 있었는데 그 둘째 아들이 바로 1863년에 철종(哲宗)의 뒤를 이어 즉위한 26대왕 고종(高宗)이었다.
고종은 어릴때에 교인인 말다 박을 유모로 삼고있었으므로 그 모친인 민부인은 일찍부터 말다 박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배우고 있었다. 따라서 민부인은 그 아들인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곧 베르뉘 장(張敬一) 주교에게 사람을 보내어 나라의 태평과 왕의 수강(壽康)을 소워나는 미사를 드려줄 것을 청한 일까지 있었고 그 남편이던 대원군(大院君)도 처음에는 천주교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변덕성이 많았던 대원군은 베르뉘 주교를 비롯한 불란서 성직자의 힘을 이용하여 때마침 두만강(豆滿江) 지대를 침범하고 있던 러시아인의 세력을 물리치려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음을 보고 1866년에는 이른바 병인(丙寅)대박해를 일으키어 1871년까지의 사이에 근 1만명의 교인을 학살하게 되었다. 이 대박해 도중 1868년 11월 18일에는 대원군의 외동딸로서 조경호(趙慶鎬)의 아내로 되어있던 이씨부인이 갑자기 간수를 먹고 죽게되었는데 이 이씨부인도 천주교를 믿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토록 천주교를 박해하던 대원군도 그 며느리이던 민비일파(閔妃一派)의 세력에 못견디어 1873년 11월 3일에 정계로부터 은퇴하지 않을 수 없게되니 종래 쇄국주의를 써오던 조선정부도 일본의 무력적 시위에 못이기어 1876년 2월에는 일본과 강화도에서 수호통상조약(修好通商條約)을 맺게되고 1882년부터는 미국을 비롯한 구미각국과도 같은 조약을 맺게되었다. 강화도 조약이 맺어진 후 일본 세력이 조선에 침투하기 시작하여 1881년 4월부터는 일본육군 중위 호리모도(掘本禮造)가 초빙되어 신식군대를 양성하게 되니 실직하게된 구식군대들은 대원군의 조종을 받아 1882년 6월에 이른바 임오(壬午)군란을 일으켰으나 청군의 출동으로 실패하고 대원군으로 하여금 청국으로 잡혀가 이후 3년동안 보정부(保定府)에서 억류생활을 하게하였다.
이리하여 이후 조선에 있어서 일본과 청국이 세력을 다투고 민비일파는 청국에 의지하여 그 권세를 유지하려하게되니 일본은 1894년 7월에 청일전쟁을 일으키어 다음해 4월에는 청국을 항복시키고 이어 같은해 10월 8일에는 일본인 자객으로 하여금 경복궁에 잠입하여 민비를 살해하게 하였다. 이에 고종은 친노파(親露波)의 책동에 따라 1896년 2월 11일 새벽(舊曆그믐날)에 엄(嚴) 부인과 세자(純宗)만을 거느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아가 이후 1년동안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곳에서 엄부인은 영친왕 은을 잉태하여 다음해 2월 20일에 경운궁(德壽宮)으로 나와 9월 25일에 그를 낳게되었다.
이와같이 이씨 왕실을 둘러싸고 꼴사나운 일이 거듭 일어나게 되니 일찍부터 천주교를 배우고 있던 왕모인 민부대부인 「閔府大夫人」은 올바르고 참되 종교에서 인생의 목적을 찾고자 드디어 1896년 10월 11일 밤에는 뮈뗄 민(民德孝) 주교를 운현궁 옆에 있던 비녀의 집으로 모셔다가 시녀 마리아 이와 유모 말다 박의 딸이던 수산나 원(元)을 대모로 삼아서 마리아라는 교명으로 성세성사와 견진성사를 아울러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영신적으로 영성을 얻게된 마리아 민부인은 궁중에서 열심히 계명을 지키는 한편 1897년 9월 6일 첫새벽에는 민주교를 운현궁으로 모셔다가 처음으로 성체를 영하는 즐거움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민부인은 이 즐거움을 대원군에게도 알리는 한편 다시 민주교에게 사람을 보내어 가능한대로 남편도 찾아보고 입교케 하도록 권하여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민주교가 대원군에게 편지를 보내어 만나주기를 청하니 대원군은 회답하여 말하기를 『그 부인에 대한 일은 매우 고마우나 나라의 일이 어수선한 이때에 서로 만나게되면 좋지 못할것이니 뒷날로 미루자』라고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80세를 넘은 마리아 민부인은 병석에 누워 1898년 1월 8일에 영생의 길을 떠나가게 되고 대원군도 그해 2월 22일에 79세로서 그 부인의 뒤를 따르게 되니 이들의 장례는 5월 15일에 함께 거행되게 되었다. 이때에 뮈뗄 주교도 병을 얻어 「샹하이」(上海)에서 정양하고 있었으므로 마리아 민의 장례는 유교식으로 거행되었으나 그후 서울로 돌아온 뮈뗄 주교는 마리아 민의 유지에 따라 그를 위한 연미사를 몇대 드려주게 되었다.
이렇듯 천주교를 박해하던 대원군의 아내인 민부인도 인생의 참된 목적을 찾아 영생의 길을 얻게되었는데 이러한 일은 그후 그의 친손자들 사이에 있어서 거듭 있게되었다.
대원군의 손자이며 고종의 아들로서는 고종이 뒤를 이어 1907년에 직위한 순종(純宗)과 의친왕(義親王)인 경과 영친왕(英親王)인 은(垠)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모친을 달리하고 있었다.
즉 순종은 민비의 몸에서 낫고 의친왕의 모친은 장빈이었고 영친왕의 그것은 엄비이었다. 이들은 1905년에 일본의 강압으로 맺어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이후 국운이 위태로워짐을 보고 특히 1910년 8월에 이루어진 한일합방으로 말미암아 국권이 한때 상실되게 되니 의친왕은 애국동지들과 손을 잡고 국권의 수복을 꾀하다가 일제의 탄압을 받게되고 영친왕은 10세때인 1907년에 일본으로 잡혀가 교육을 받고 1920년 4월 28일에는 일본 황족인 나시모도미야(梨本宮 守正) 전하의 장녀인 방자(方子)와 더불어 정책적인 결혼을 강요되게 되었다.
(3)
그러던중 민족의 해방을 맞이하여 신생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6·25의 전란을 맞이하여 민족이 고난에 빠지게 되니 이러한 사양(斜陽)의 왕족(王族)들도 인생의 참된 목적을 찾아 천주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특히 영친왕은 건공(鍵公)과 우공(우公)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었으나 출사(出嗣)한 우공은 태평양전시에 전사하고 건공은 일본으로부터 귀국할 수 없게되니 늘거 병석에 누워있던 의친왕은 교인이던 구왕실 서무계장의 감화를 받아 1955년 8월 9일에 서울 가회동(嘉會洞)성당의 박(朴遇哲) 신부를 불러다가 비오라는 교명으로 성세를 받고 동월 12일에는 바오로 노(盧基南) 대주교를 모셔다가 견진성사와 종부성사를 아울러 받게되었다. 한편 의친왕의 부인인 김(金淑) 부인도 모든 준비를 갖춘 후 동원 14일에 가회동성당에서 마리아라는 교명으로 성세를 받게되었는데 비오 의친왕은 동월 16일에 79세로서 선종하게 되고 그의 장례미사는 명동대성당에서 장엄하게 거행되었다.
따라서 의친왕의 자부이며 우공의 미망인인 박찬주(朴贊珠) 여사와 이의 아들인 이종(李종)도 입교하게 되었는데 이종은 현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다.
한편 순종의 후계자로 되어있던 영친왕도 민족의 해방이후 이승만의 억제로 귀국하지 못하고 아들인 구(玖)가 유학하고 있는 미국에 다녀온 후 병석에 누워있다가 친지인 교인의 지도로 얼마전에 대세를 받게되었다고 전한다. 그는 일본 부인과의 사이에 진(瑨)과 구라는 두 아들을 두었었으나 진은 1세때에 죽고 1931년에 출생한 구는 195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유명한 「엠마이티(MIT) 공과대학」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하고 중국인이 경영하는 건축회사에 취직하여 있다 한다.
내가 미국 「하바드대학」에서 연구하던 1956·7년에도 이구(李玖)는 바로 그 옆에 있는 「엠아이티 공과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으나 나는 그를 만나볼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듣건데 그는 처음에는 한국인의 모임에도 나오고 있었고 한국어도 배우려 하고 있었으나 원래 한어를 모르는 그는 차차 한국학생들과 접촉함을 멀리하고 있다가 대학졸업후 취직하게 됨에 이르러 독일계 미국인 주리아 뮤우로크와 결혼하였다 한다. 그는 「엠아이티」공과대학에서 공부할 때에 동포학생들에게 말하기를 『앞으로 건축학을 배워서 조국에 돌아가 이 방면의 발달에 이바지 하겠다』라고 하였다 하니 앞으로 영친왕의 건강이 회복됨과 아울러 다같이 고국을 찾을 날이 있을 것이라 믿어진다.
끝으로 몇달전에 귀국한 덕혜옹주(德惠翁主)는 고종의 오직 하나인 딸로서 일정의 강요에 못이기어 대마도주(大馬島主)이던 백작 소오다깨시(宗武志)와 혼인을 맺었으나 항상 정신적인 고통에 사로잡혀 병을 얻은채 귀국하여 현재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요양중에 있다. 덕혜옹주의 건강이 회복됨과 아울러 천주의 특별한 안배(案配)가 그에게도 있게 되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1962. 6. 15)
柳洪烈(서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