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기까지 (23) 再會(재회) ⑥
발행일1963-04-28 [제372호, 4면]
성모병원을 나온 수련이는 곧장 「사보이호텔」로 갔다. 안명철은 마침 있었다. 그는 몹시 반가워했다.
『아--니 진작 연락 좀 해주시질 않구 어제밤에 「홍콩」서 전화가 왔었는데요-』
『왜 무슨 새로운 연락이라두 있었어요』
『괘-니 궁금한 모양입니다. 아마 그동안 참고 견디던 그리움이 불결같이 넘쳐나나 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밤에 「홍콩」에 전화 좀 걸라구요』
『어쨌든 좀 앉으세요』
안명철의 태도는 완전이 달라졌다. 마치 주인댁 안방마님에 대한 경의(敬意)를 나타내고 있다.
『언제쯤 오신다는 말은 없었나요』
『그게… 이왕 서울로 돌아오면 아주 와서 살 계획이라서 본점을 서울에두고 「홍콩」엔 지점을 두려는 눈치올시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수련이는 주인댁답게 으젓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안명철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호…호 요전번 전화걸 때 그런 말씀이 있었어요』
『그래요… 어쨌든 좋으시겠읍니다』
『모두가 안선생님 덕택으로 알구있어요』
『온 천만에요 제야 뭐, 박사장의 일을 도와드렸을 뿐입니다』
여전히 안명철은 저자세를 취했다.
『실은… 안양에 마침 알맞은 목장을 파는게 있어서 그걸 사가지구 저는 안양서 살아볼려구요』
『그거 참 「꾿 아이디어」군요. 박사장이야 뭐 자가용차로 통근하면 될거구…』
『그래두, 한 번 물어보구 결정하려구…』
『염려마세요 오늘밤 열시쯤 「홍콩」을 불러 드릴께 박사장과 직접 상의해보세요 제 생각 같아서는 두 말 않고 승락할 것 같긴 합니다만.』
『그럼 있다 밤 열시 조금 전에 다시 오겠어요』
수련이는 제법 귀부인답게 말씨가 점잖았다.
『그래 남령 「빠」는 물론 그만 두셨겠지만… 머 다신 아무 문제 없겠죠』
안명철이는 손을 비비며 거북한 표정을 했다.
『문제가 무슨 문젭니까…』
『그야 그렇겠지만 어쩐지 한 번 더 물어보구 싶어서요』
수련이는 안명철을 노려보았다. 기껏 추켜세워놓고 다시 꺾어 누르려는 술법이라고 본 까닭이다. 수련이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안명철이에게 속을 보이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차후 다신 묻지 말어주세요. 제 뒤는 깨끗합니다. 일단 저를 믿어주셨으니 그대루 믿어주세요』
언성은 부드러우나 저의는 날카로운 반발이다.
『그럼 어서 일보시구 밤에 들러 주세요』
말문이 막힌 안명철은 수련이를 얼른 보내려했다.
『그럼 있다 오겠읍니다.』
수련이는 억지로 미소를 띄우며 안명철의 방을 나왔다. 발길이 명동거리로 내키건만 일부러 퇴계로편으로 돌아갔다. 명동거리가 두려워진 까닭이다. 그동안 명동서 지낸 일이 무슨 악몽같이 머리에 떠오르는 까닭이다. 아물어가는 상처를 덧드리지 않으려는 심경이다. 술집에서 만나던 술주정꾼을 만나는게 지겨워진 것이다.
(누구나 다 그렇지만 특히 젊은 여자는 한 번 잘못 몸을 잠그면 다시는 헤어나기 어렵고 비록 구원을 얻는다해도 몸에 묻은 때를 씻으려면 무한 고초를 겪어야 한다) 수련이는 이런 생각을 하고 가벼운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숫제 남령「빠」에 나아가 마담이며 친구에게 어엿하게 작별을 하는게 당당할거야) 이렇게 생각이 들었다.
(머- 나는 술집에서 일은 봤지만 아무런 실수는 없었으니까)
수련이는 퇴계로로 향해가던 걸음을 다시 돌려 남령「빠」를 찾아들었다.
『마담 안녕하세요』
수련이가 들어서자 마루에서 머리를 가리던 마담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린다. 떠들지 말라는 신호다. 일주일에 한 두 번 와서 자고가는 바깥양반이 그저 주무시는 모양이다.
『마담 전 안양 친정으로 가요』
수련이는 나직히 한마디 했다.
『왜 애기아버지허구 서울서 살지 않고』
『서울은 너무 복잡해서 견디어 낼 것 같지 않아요』
『뭐 「홍콩」서 돈많이 번 분이라며 어쨌든 잘 됐어 나같이 이꼴을 하구 백년을 살면 무슨 가치 있어』
마담은 서글픈 얼굴을 하고 바깥냥반으로 불리우는 놈팽이가 아직도 코를 고는 웜대방을 흘겨보았다. 수련이는 이런 때 무슨말로 마담을 위로해야 할지 얼떨떨해졌다.
『행복이란 억지로 끌어들일 수 없는건가봐요. 늘 기다리는 마음-으로 행복이 찾아왔을 때 후회하지 않을- 그런 마음씨로…』
수련이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아 몇 번이고 말문이 막혔다.
『정말 수련이는 용해- 참 용하게 참아왔어. 수련인 행복해야해』
마담은 새삼 자기의 신세 자기의 걸어온 길이 서글퍼진 모양이다.
『마담 괴로우시죠』
『말두 말어…』 마담은 눈물이 글성했다.
『천주교를 믿어 보세요. 마음이 가라앉고 보람있는 인생을 찾으실 거야요』
『나같은게 천주교는 다 뭐야』
『아냐요 입교하기 전까지의 내력은 통 불문에 붙인대요. 묵은 때만 깨끗이 씻으면 새로운 인생의 문이 열리는거래요』
수련의 표정은 엄숙했다. 그러나 마담은 픽 웃었다.
『그래 정 까마득하거든 성당에라두 찾아가야지』
수련이에게 하는 대답인지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대답인지 어쨌든 마담의 표정은 엄숙했다.
(이 사람도 구원을 받아야 해)
수련이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안방에서 놈팽이의 굵은 기침소리가 나는 기회에 수련이는 마담과 작별을 했다. 마루 끝에는 수련이가 놓고간 과자 상자가 오드만히 놓여있었다.
수련이의 일정은 몹시 바빴다. 성모병원에 가서 진영이의 입원비를 치르고 영천 주인집에 가서 인사를 하고 저녁은 순옥이와 밖에서 먹었다. 특히 천주교에 들어갈 문을 열어준 아주머니에게는 철에 맞추어 치마 저고리감을 선사했다.
(이젠 다-끝났다)
「사보이 호텔」로 찾아가는 수련이는 가슴이 후련했다. 「호텔」에 당도하니 꼭 열시 십분 전-
『어서오십쇼 곧 나올겁니다』
안명철은 여전히 수선을 떤다. 그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가는게 몹시 웃으웠다. 그렇게 오만하던 안명철이가 아니었던가.
전화는 예정대로 제시간에 통하였다. 수화기를 잡은 수련의 손은 가벼이 떨렸다. 소녀같은 순정이 그에게 남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여보세요! 나야요 수련이야요』
『아- 진작 전화 좀 걸일이지 뭘 했어』
영진이는 첫마디에 불만이다. 그러나 그 불만이 수련이에게는 지극히 고맙다. 수련이의 전화를 기다렸다는 불만이 그 얼마나 대견하랴 이날밤 전화로서 수련이는 영진이가 「홍콩」에서 이미 천주교에 입교한 일도 알았고 안양에 목장이 있어 그것을 사겠다는 건의도 두 말 없이 통과했다.
『인제는 오시기만 기다리겠어요』
수련이는 전화를 끊고 잠시 멍하니 앉아있었다. 벅차게 밀려드는 행운을 미처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벅차서이리라.
수련이는 눈을 감고 어머니와 미남이와 셋이서 성세를 받는 광경-박영진이와 둘이서 화려한 제대-성스러운 주님 앞에서 혼배성사를 받는 광경 꿈은 꿈을 불러일으켜 잠시 황홀하였다.
(인제는 안양으로 가서 교리공부만 부지런이 하면된다)
은행에서 찾은 돈을 보자기에 싸서 가슴에 안고 걷는 수련이의 발길은 가볍기 봄바람같았다.
『농장을 사서 곧 수리하고 어머님 계실 방과 미남이 공부할 방 그리고 우리들이 지낼 방을 마련해야지』
그뿐이랴 영진이가 김포비행장에 도착하는 날 미남이에게는 꽃다발을 들려주리라 생각했다. 언젠가 영진이가
『당신은 살색이 희여서 짙은 빛이 맞어』
하던 생각이 나서 비행장 나갈때 옷빛은 쑥색으로 하리라고 생각했다. 수련이는 이 생각 저 생각 혼자 웃다가 제풀에 움찔했다. 아마 계면쩍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