唯一(유일)한 五傷生存者(오상생존자) 비오 神父(신부)는 受難(수난)의 象徵(상징)
敎會(교회), 定式宣言(정식선언)은 아직 않고
데레사 노이만이 죽음으로써 현대에 가장 유명한 오상자 둘 중에 한 사람이 없어진 셈이다. 다른 한 사람은 이타리 「로톤도」의 성요왕 수도원에 아직 생존한 가푸친프란치스회원 75세난 「피에트렡치나」의 비오 신부다. 교회사에 기록된 3백21명의 오상자 가운데 신부로서 오상을 받은 이는 그가 처음이다.
1918년 9월 어느날 아침 젊은 비오 신부가 미사를 마치고 묵상중 졸지에 정신을 잃고 마루 바닥에 자빠졌을 때 피가 흐르는 그의 오상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그는 몇해 전 신학생 때에 밖에 나타나지 아니한 오상을 받고 지극한 통각을 남모르게 참아왔다고 한다.
미신자 하나를 포함하여 유명한 의사들이 연달아 진찰했으나 그 상처에 대한 자여적인 설명을 붙이는데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 신부는 자기 상처를 낫지 못하게 하는 원인불명의 병이 들렸다는 이론은 그가 탈장의 수술을 받았을 때 절개처(切開處)가 닷세만에 아물은 뒤에야 기각되었다.
오상의 상처에 나타난 기능장애에는 아무런 전념성이 발견되지 않았다. 상처에 고약을 바르고 처치를 가했으나 점점 더칠 뿐이었다. 비오 신부가 황홀상태에 들어 있을 때는 보통이 체온계로는 잴 수 없을 만큼 고도의 신열이 난다.
비오 신부의 오상은 항상 출혈하는데 옆구리 상처의 구멍은 매일 손수건 셋 내지 다섯을 적신다. 그러나 그의 손 상처는 출혈이 적고 미사 때를 제외하고 늘 장갑을 끼고 있다.
그는 1889년 「피에트렡치나」마을의 「포르지오네」라는 가난한 집에 탄생하여 소년시대부터 경건하기로 주위의 이목을 끌었다. 그의 부친은 수년간 미국서 노동하여 아들의 신학교 학비를 벌어보냈다.
비오 신부는 밤중 2시에 일어나 세시간 묵상하고 새벽 5시에 미사를 드리는데 1시간반 내지 2시간이 걸린다. 그것은 그가 성체 축성 후에 의례히 황홀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는 이른 오후에 몇조각의 「빵」과 나물을 하루에 한번 먹을 뿐이다. 평구리와 두발의 상처에서 잃는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물과 과즙을 많이 마신다.
그는 세계 각처에서 모여드는 순례자들의 고해를 듣기에 쉴 사이가 없다.
그리고 수도원 밖을 나가는 일이 없이 이따금 세계 각처의 먼곳에 나타난다. 그가 나타남으로써 생명의 구원을 받은 사실은 감사의 편지가 증명한다.
한가지 실례를 들면 에디오피아 전선에서 어느 이타리 병사 하나가 문득 나타나 보이는 수사를 따라 갔더니 총탄을 면했다는 일도 있었다.
궁벽한 산중인 그의 수도원까지 자동차 도로가 닦아졌고 그 마을은 여관이 늘어 소도시가 될 만큼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 고해 차례가 돌아오기까지는 적어도 2주간을 기다려야 한다.
1956년에 5백개 침대의 병원을 지어 순례자들 가운데의 병자를 수용하고 있다. 그 병원을 세울 때 남포질을 하다가 돌에 맞아 절반이 다라난 어느 일꾼의 얼굴에 그의 손이 닿자 즉시로 나은 일도 있었다.
그의 키는 보통이며 걸음걸이는 약간 힘없이 보인다. 수염을 기르고 반백의 머리는 짧게 깎았다. 그는 생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또 정서적으로 정상적이다. 감정이 지나칠 때는 더러 무뚝뚝하게 될지라도 그의 천성은 부드럽고 명랑하다.
이타리의 무신론자 내지 공산주의자에게 유일한 두통거리가 있다면 바로 비오 신부의 기적이다 무지한 농민층을 끌기 위하여 오상 기적을 날조했다고 교회를 비방하는 통신이 각국 신문에 보도된 일이 있다. 이에 대하여 교황청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비오 신부에게 일어나고 있는 여러가지 기적적인 사건에 대해서도 교회에서 결정을 지을 때까지는 아무도 인간적인 증명 외에는 아무말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남다른 성덕만은 직접으로 만나지 않고 사진만을 보더라도 틀림없이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