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전부터 세계적으로 알려진 독일의 오상자(五傷者 STICMATIC) 데레사 노이만양이 64세를 한 평생으로 지난 9월 18일 1898년 4월 출생 이래 떠난 적이 없는 고향 「콘나스로이트」 마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곳은 「바바리아」의 체코스로바키아 국경에 가까운 궁벽한 농촌이나 「나치스」의 패망과 더불어 전주한 연합군의 각국 장병의 방문으로 말미암아 노이만의 오상 기적은 비가톨릭사회의 눈에도 뚜렷한 사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오상자의 신비로운 수난은 많은 무신론자를 외두케 하고 더 많은 프로테스탄트가 귀정(歸正)하는 동기가 되었다.
■ 가난한 農夫의 ”딸”
그는 가난한 농가의 처녀로서 20세때에 일을 하다가 척추를 크게 다친 것이 원인이 되어 눈이 멀어버리고 반신불수의 병신이 되고 말았다. 그러한 말 못할 괴로운 신세가 된지 5년만인 1923년 4월 29일 뜻밖에도 시력이 회복되었다. 그는 틀림없이 소화 데레사가 전달해준 덕분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날은 바로 소화 데레사의 시복식 날이었다. 또다시 2년후 소화 데레사 복녀의 시성식 날에는 척추의 상처가 당장에 전쾌하는 동시에 반신불수마저 그의 몸을 떠났다. 아마 그는 소화 데레사 성녀가 시복되기 전부터 이미 『어린애의 신심』을 따랐고 또 이 성녀를 무척 사랑했던 모양이다.
■1926年 첫 五傷
그와 동시에 오주 예수의 수난에 대한 신심이 어찌도 극진했던지 1926년 봉재 때 수난 본날에 처음으로 오상이 그의 손발과 옆구리에 나타났다. 이마에도 가시관의 상처가 나타나고 모든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의 피묻은 옷이 빨래 때에 그의 모친의 눈에 띄어 그는 끝끝내 사실을 감출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 이래 오상은 항상 몸에 남아 있었고 해마다 봉재 때가 오면 수난 본날에는 오상과 이마에서 으례히 피가 흘렀다. 피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몸소 경험하는 성십자가의 고통을 이기자 못해 드러눕게 된다.
■ 아라메아語를 解得
그러는 동안 황홀 상태에 들어가 무엇인지 중얼거리는데 아무도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어느해 박언학자(博言學者)가 곁에서 듣고 그것은 바로 그 시대에 예수께서 사용하신 「아라메아」어임이 확인되었다. 고등소학의 교육밖에 받지 못한 그의 「아람어」는 정확한 문법으로 「겟세마니」동산으로부터 시작하여 「갈바리아」산상에 이르기 까지 연다른 장면 장면의 광경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세속이 통신을 통해 매년 보도되었으나 1951년만은 그 날에 그러한 현상이 도무지 없었다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그 해는 몇번의 다른 금요일에 피가 흘렀다.
■ 25年間 領聖體만
그는 죽기 전까지 약25년간 매일 성체 외에는 아무것도 삼키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건강상태는 정상적이었고 일반 농가집 여성으로서 가능한 힘드는 노동을 할 수 있었다.
과연 이것이 사실인지는 그의 부모와 당자의 거절로 실지조사가 있기 던까지는 교회당국도 확신할 수 없었다. 어느해 소속주교의 명령으로 2주간동안 밤낮을 이어 계속하여 의사와 간호원의 교대감시를 받고 나서야 사실이 입증되었다. 1937년에는 로마의 검사성성에서 의학적 조사를 받겠느냐고 공식으로 문의했을 때 그는 서슴치 않고 서면으로 동의했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그 당시 병중에 있는 자기 딸을 가정에서 떠나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재조사는 실시되지 않았다.
그의 부친의 태도는 여러가지 의학상 실험적 조사는 자기 딸에게 영성적으로나 생리적으로나 해로울 것이라는 여러 의사들의 충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어느 의사 하나가 『만일 이 사람을 우리 병원에 데려다 두면 단시일에 그런 증상을 그이 몸에서 몰아내겠다』라고 장담한 일도 있었다.
■ 敎區, 聖廳에 順從
「뮨헨」-「프라이징」 대주교구 당국은 『우르바노 8세 교황의 칙령에 순종하여 「쾬네르스 로이트」에서 발생한 모든 사건에 대하여 성교회가 결정을 짓지 아니하는 한 우리는 인간적인 증명 외에는 아무것도 줄 수 없노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한번은 본당 주임이며 그의 영도사(靈導師-SPIRITUAL DIRECTOR)인 요셉 나베르 신부가 그에게 물었을 때 그는 즉시에 『아이구 신부님 성체는 참으로 먹는 양식이라고 오주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나요?』라고 담담히 반문했다고 한다. 주임신부의 출타로 본당에 미사가 없는 아침에도 그는 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성체를 영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나베르 신부는 성체합을 조사하고 그 사실을 인정했다. 긜고 그 신부가 미사 지내던 그 시간의 그곳 성당 안의 광경을 그는 역력히 이야기 했다. 그는 자기 본당 안에서 나감이 없이 다른 성당에서 나베르 신부의 미사에 참례했던 것이다.
■ 한 酒酊꾼 禁酒
한번은 어느 주정뱅이의 회두를 위한 기구의 청을 받고 그는 술냄새를 풍기면서 명정(酩酊) 상태의 고통을 몸소 경험했다. 그리고 그 주정꾼은 그동일한 시간에 술을 끊고 회두했다고 한다.
그가 예언자라는 소문이 높아지자 「나치스」는 자기들에게 유리한 말을 하라고 그에게 강박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나치스」는 그 마을의 성당을 향하여 원거리에서 대포를 쏘았으나 그는 무사했고 인명의 피해도 없었다.
그의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번지는 신심이 많은 사람을 회두시킨 사실은 노이만 사건의 다년간 연구자 분도회원 풀라씨드 요르단 신부가 증언한다.
비오 11세 교황의 촉탁으로 노이만 사건을 조사한 신비신학자 방지거회원 아고스티노 제멜리 신부는 『히스테리의 흔적이 없음』이라고 보고했다.
■ 두 敎皇이 個人降福
비오 11세 · 비오 12세 두 분 교황은 그에게 개인적 강복을 보냈고 비오 12세 교황은 보목편(寶木片)을 하사했다. 진짜 성십자가의 그 한 쪼각은 그가 현시(顯示)에서 목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로 설계된 석상 안에 삽입되었다.
그의 임종은 옛날의 영도자 92세의 나베르 신부가 지켜주었다. 지난 30년간 그가 신비롭게 체험하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목격하고자 해마다 수난 본날이면 세계 각국의 순례자들이 밀어닥치던 그 마을 농가의 어둠침침한 방의 주인은 이제 「수수께끼」를 남기고 영원히 떠났다.
그러나 기적적인 사건을 제쳐놓고도 언제나 집안일에 바쁘던 그리고 손들에게 언제나 다정하고도 「유모아」를 잊지 않던 그의 추억은 그를 만난 사람들에게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