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날
世代의 橋梁 「어린이」
우리나라서 특히 無視되는 어린이들, 胎兒부터 所重히
발행일1963-05-05 [제373호, 4면]
5월5일은 어린이날이다. 어린이들을 바르게 씩씩하게 길러야 할 것을 생각하고 실행하는 날이다. 이것은 가정적 축일이오 앞날의 우리나라의 늠늠한 모습을 위해 축복받아야 할 날이다.
가톨릭에서는 어린이는 어머니 태중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보호를 받고 그 생명을 어른과 마찬가지로 중하게 본다. 그러므로 고의적 낙태를 엄금하는 것이요 우리가 인공적 산아제한을 엄히 반대하는 것은 국가의 기초 민족의 번영을 손상시키는 근본적 악덕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를 이해하는데 있어 그 구체적 실행방법을 검토하기 전에 먼저 교회와 현사회와 거기 속하는 모든 것이 어른을 위해 된 것이 많다고 하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사회의 중요부문은 어른의 것이요 교회는 처음부터 사회 전체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나 교회도 어른의 세계에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사회에 있어 어린이의 세계나 빛나는 다음 세대를 질머지고 있는 중요성으로 보아 우리는 어린이의 세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물론 교회는 어린이에게 요리문답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거기 어린이의 생활 자체를 형성하기엔 너무나 부족이 많다. 어린이를 가지고 있는 신자 어른의 몇 「퍼센트」가 자기 자녀의 장래에 대하여 열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러한 분위기에서 종교를 배우는 어린이가 그 「실생활」과 「요리문답」을 어떻게 잘 분리하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기억력이 좋은 아이는 전날 교리교사가 외우라고 한 문답책을 들여다 보고 다음날 교리반에 와서 교리교사 앞에 어른이라도 알아듣기 어려운 문답책 몇 구절을 훌륭하게 외운다. 교리교사는 그 아이를 칭찬하고 그 아이가 가정에서나 학교에서의 품행이 어떠한 지도 모르고 덮어놓고 「열심한 아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습고도 놀라운 일이다.
국가는 2세 국민으로 번영된다. 내일의 국가 융성을 위해 오늘의 이세에게 진정한 종교생활을 시켜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이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해야 한다. 오늘의 사회는 제자가 스승을 무시하고 자녀가 부모를 죽이고 젊은이가 늙은이를 치는 추태를 부리고 있다. 이러한 어두운 사회에 어른들의 책임이 더 크다. 그것은 일반으로 어른이 젊은이에 대하여 항상 책임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주께서 어떠한 의향에서 부모들에게 자녀를 주셨는가 결국 이것이 유일한 표준 즉 우리의 공적과 책임 우리의 능력과 고민의 표준이 된다. 천주께서 부모들이 자녀를 도와 어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꾸준히 돌보아 신심이 건전하게 발육하고 독립생활에 견딜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자녀를 주셨다. 그러므로 자녀는 한 과제로 부모에게 주어졌다. 자녀의 행복발달 진도 이 세상의 운명 그리고 영원한 운명이 중대하다. 여기 일어나는 문제는 부모들이 사심을 버리는 것이다. 자연은 미리 섭리해준다. 부모의 사랑 특히 모성애는 자연히 사심이 없는 이상한 특징을 새겨주고 있다. 이 귀중한 자연의 선물이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 고상하고 순진해야 한다. 자녀의 행복만을 생각하는 자각있는 의지를 가지기까지 고상하고 순진해야 한다.
이러한 과제는 오로지 교육이란 과제에서 효과를 낼 수 있다. 특히 종교교육이 어려운 과제이다. 교육에는 남의 도움이 필요하다. 형제 자매도 많은 공헌을 한다. 교육에 근본적인 도움을 주는 곳도 학교와 교회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대해 천주의 대리자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영적이다. 어린이에게 대한 교육이 중대하고 가치가 있기 위해서 교육자의 인격이 어린이에게 중대하고 가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어린이에게 줄 수 있는 둘째 도움이다. 어린이는 예민한 관찰력을 가지고 있다. 부모의 명랑한 얼굴에 자기의 이상을 볼 때 아버지의 얼굴 가운데 천주의 모상을 보고 어머니의 얼굴의 양선한 빛 가운데 성모마리아의 빛나는 모습을 인정할 때 부모로서 그 이상의 아름다운 성공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