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기까지 (24) 再會(재회) ⑦
발행일1963-05-05 [제373호, 4면]
수련이는 한창 분망해졌다. 인상이가 떠나간 후 농장과 주택도 돌아봐야하고 서울에 있는 집도 끌어내려와야했다. 그리고 며칠에 한 번씩은 「사보이호텔」 안명철에게 연락도 취해야 할 형편이다. 두통거리이긴 하지만 성모병원에 누워있는 진영이의 병실도 전혀 안들여다 볼 수도 없다. 그뿐이랴 밤이면 어머님과 교리공부에 한 두 시간씩은 바쳐야 했다.
그러나 지금의 진영이에게는 바쁘면 바쁠수록 즐겁고 흐뭇함을 어쩌랴.
『수련아 고단하겠다. 오늘 밤은 교리공부 쉬고 일찍 자거라』
어머니가 딱해서 한마디 하더라도
『안 돼요 미남이 아버진 벌써 영세했다는데- 저도 그 이가 오기 전에 세를받고 기다려야 해요』
수련이는 펄쩍 뛰었다.
『성세 주시는 것도 다 때가 있다던데…』
어머니가 또 한 마디 했다.
『그건 걱정할 거 없어요. 신부님께서 특히 생각하시면 된대요』
『그건 교리공부 잘하고 성심껏 예비를 해야…』
어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그렇게 정성껏 예비를 하자는 거죠』
수련이는 말끝도 맺기 전에 벌써 교리책을 펴들었다.
『온 애두, 나보다 나중 시작했건만 깨친건 더 많아!』
어머니는 대견스럽다는듯이 미소를 풍겼다.
『이번 미남이 아버지 오면 둘이서 혼배성사 올릴 작정야요』
『아-니… 미남이가 몇살인 줄이나 알어.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혼배란 다 뭐냐』
어머니는 입을 벌렸다.
『우린 언제 결혼이나 했어요. 이미 세속결혼을 한 사람도 일부러 혼배를 다시 한다는데 우리야 뭐 반드시 해야죠 안 그래요…』
수련이의 눈동자는 새로운 희망에 불타있다.
수련이가 성세를 받은 것은 초가을 접어들어 박영진이가 「홍콩」에서 돌아오는 바루 전이었다.
수련이의 염원을 이루어 주려는 신부님의 너그러운 뜻에서이다.
뿐만 아니라 수련이의 정성스러운 태도가 인정받은 까닭이리다. 따라서 수련이의 어머니와 미남이까지 한날 한자리에서 어엿한 천주교우가 된 것이다.
수련이는 즉시 농막 앞을 장미넝쿨 욱어진 곳에 대(台)를 모으고 성모상을 모셨다. 유리로 둘러싼 작은 탑 속에 자비로우신 성모 마리아님의 따뜻한 빛을 항상 가까이 하자는 의도이다.
『엄마 아버지가 오시거든 우리 셋이서 마리아님께 신공드려… 응』
미남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성모상 앞에 무릎 꿇고 기구를 드린다.
『마리아님이시여 우리 아버지가 얼른 오게 해주십시요』
『온 애두 아버지가 어련히 올라구 저야단야』
할머니가 한마디 했다.
『시! 할머닌 미나버덤두 더 기다리면서 뭘!』
미남이가 반격을 한다.
『오-냐 네 말이 맞다. 너무 기특해서 한말야』
할머니는 미남이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미남아! 이것 좀 입어봐라 댄추 다시 달았다.』
수련이가 큰 방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큰 방은 이 농막에서 면적이 제일 넓은 방이라서 미남이를 그렇게 부른 것이다. 수련이는 미남이의 옷을 꺼내놓고 아버지 마중 나갈 때 입을 옷을 마련해 두자는 것이다.
『미남인 한복을 입혀가지구 가! 그래야 아버지가 더 반가워해』
할머니가 몇 번 한복설을 고집했으나 미남이가 응하지 ㅇ낳아 결국 양복으로 작정이 된 것이다.
『평생 처음 부자간에 상면하는 자리니까 옷빛갈도 부드럽고 으젓한게 좋을거야』
수련이는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그래서 이미 사다 논 옷을 비켜놓고 또 다른 빛으로 한 벌 더 사온 것이다.
하필이면 날림으로 지어 파는 엉터리 제품을 만나 우선 단추부터 고쳐달려했다.
영진이가 당도하는 날 날씨는 맑고 바람도 따사로웠다. 안명철이가 주변한 택시에 올라, 수련이는 미남이와 같이 김포 비행장에 나아갔다.
수련이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날이다. 단념하다시피 만날 엄두도 내지 못하던 박영진이가 젊은 실업가로서 다시 나타나다니 꿈같은 이야기다.
만일에 그 사이에 몸을 삼가지 않았더면 오늘의 행운은 눈물과 회한으로 바꾸어졌을 것이다. 아슬아슬한 일이다.
수련이는 오늘의 이 행운을 천주님께 감사하고 있다. 성모마리아님께
『고맙습니다』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다. 비행기가 도착하는 순간 수련이는 손에 쥐고 있던 묵주를 꼭 쥐었다. 이래야 마음이 든든해지나 보다.
『부인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이 잘 보입니다』
안명철은 수련이에게 몹시 공손하다.
『엄마! 아버지 어디 있어』
미남이가 흥분해서 물었다.
『저…저…기 저 비행기 층대를 내려오신다』
『난 아버지 얼굴 몰라. 얼른 알려주어』
미남이가 불평이다.
『저, 저기 가방을 들고 회색 모자를 쓴- 키가 크고…』
수련이는 남편을 바라보며 한마디 한마디 뇌까렸다. 멍하니 바라보는 수련이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무나 기꺼운 까닭이리라.
(이날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날이 오기까지 무던히도 참았다.)
이 두 가지 감상이 가슴에 넘쳐서 눈물을 자아내는 모양이다.
비행장에 내린 박영진은 마치 잠시 여행이나 다녀온 사람같이 가볍고 부드러웠다. 미남이를 덥썩 안아보며 『내가 너이 아버지다…』
무슨 선언(宣言)이나 하듯이 명랑한 음성이다. 수련이는 미남이를 귀엽다고 안아보는 박영진의 애정이 자기의 가슴에 직통(直通)되는 것을 느꼈다. 무한 기꺼웠다.
『장모님 너무 오래 실례했읍니다』
영진이는 수련이는 비켜놓고 미남이와 장모에게만 수작을 늘어놓는다. 수련이는 옆에서 듣고만 있어도 흐뭇했다. 수련이가 나은 아들과 수련이를 나은 어머니에게 다정한 영진이의 태도는 모두가 수련이에게 대한 애정의 표시가 되는 까닭이리라.
『자 앞차에 두분이 타세요. 뒤차엔 제가 모시고 타겠어요』
안명철이가 자동차 문을 손수 열었다. 영진이는 비로소 수련이의 팔을 잡으며
『자… 타요.』
따뜻한 한 마디.
『먼저 타세요』
아내다운 겸양.
『오늘부터 만사는 당신 본위요. 자 어서 타요』
뜻깊은 선언.
『아-이』
마지 못해서 수련이는 먼저 탓다. 영진이도 뒤따라 탓다. 어깨가 맞닿고, 손길이 나란히 놓였다.
『미안해요』
영진이는 넌즈시 수련이의 손을 잡고 소근거렸다.
『어디로 가시겠어요』
수련이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안양으로 가야지…』
영진이의 대답은 힘찼다. 차는 쏜살같이 영등포에서 남쪽으로 꺾여 안양으로 향해갔다. 이날밤 수련이는 미리부터 준비한 저녁잔치를 베풀었다. 금잔디 밑에 상을 차리니 성모상이 바라보이는 곳이다.
『여보 성모님께 촛불을 밝혀드립시다』
영진이가 제안을 했다.
『아이 참 그걸 채 몰랐군요』
수련이는 가볍게 웃으며 곧 촛불을 밝혔다. 어느 틈에 영진이는 성모님 앞에 무릎꿇고 고개를 숙인다. 수련이도 그 옆에 무릎꿇었다. 둘이서 무슨 기구를 드리는지 알길 없으나 서루가 오늘의 행운을 깊이 감사하리라.
『오늘이 오기까지 너무나 긴 세월 서로 멀리 살았다. 그러나 오늘이 되고보니 지나간 세월이 너무나 짧은 것 같기도 하다. 오늘의 기쁨이 너무나 벅차서이리라』
영진이는 수련의 귀에다 입을대고 나직히 소근거렸다.
『그간 너무 미안했오. 난 당신이 이렇게 기다려줄줄은 모르고 걱정했어… 우리 곧 성당에 나아가 혼배성사를 드립시다. 응』
수련이의 대답은 눈물에 대신했다.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자꾸 흐르니 딱한 노릇이다.
『엄마 옷 다 젖어』
어느 틈에 옆에 와서 같이 무릎꿇고 있던 미남이가 소근거렸다.
大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