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51) 탈만 라세트의 방어소 · 은둔소
발행일1962-10-07 [제345호, 4면]
1916년 6월 「타만라세트」의 방어소는 거의 낙성이 다 되었다. 이것은 「투우부」라고 하는 굳지않는 진흙벽돌로 만든 정사각으로 된 아담한 건물이었다.
옆의 길이가 14미터이고 기초는 2미터 두께의 외벽으로 되었으며 높이 8미터나 되는 위에는 전망탑과 총안이 구비되어 있었다.
집주위에는 외벽 옆에 판 네모난 웅덩이로 보호되어 있다. 유일한 입구는 작은 다리로 되어 있으며 그것을 건너가면 얕은 담으로 둘러싼 낮은 문에 다다른다. 건물의 중앙에는 중정(中庭) 우물, 화덕, 토민굴 같은 방의 입구 등이 있다. 외벽 위에서는 「타만라세트」고원의 지평선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가 있다.
수백미터나 떨어진 곳에 농민들의 집이 띠엄띠엄 흩어져 있고 서남쪽으로 「구디아」산맥의 길고 편편한 꼬리가 보인다.
군당국에서 총 한다스와 탄약과 식량을 약간씩 보내주었다. 기습공격이 있는 외에는 이것을 가지고서도 농민들은 자위(自衛)할 수가 있었다.
포울암바 레크와 몇 사람의 농민들의 도움으로써 신부는 이사를 하였으며 「후리케에트함」에 있는 것을 전부 운반했다.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사하라의 한 구석은 변함없이 평온합니다』고 그는 어떤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트리폴리」 지방의 반불(反佛)주의자들의 운동이 높아가고 있어서 경계태세입니다. 이곳 「투아레그」인은 충실하지만 우리는 「트리폴리」지방의 사람에게 공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은둔소를 작은 방위소로 변경시켰읍니다. 하늘 아래에는 새것이 없읍니다. 이곳에 있는 총안을 보면서 나는 10세기의 군비를 갖춘 수도원과 교회를 생각하고 있읍니다. 옛날의 모든 일이 다시 돌아와서 영구히 사라졌다고 믿고 있던 것이 왠일인지 또 나타났읍니다. 탄약상자 여섯개와 그라소총 30개를 맡겨 두었읍니다만 이것도 나에게 우리의 청년시대를 연상케 합니다.』
수일전에는 개방된 자유로운 은둔소에서 살고있던 사람이 작은방어소에 틀어박혔다.
11년전 「투아레그」인 사이에 무장도 안하고 온 사람이 방금 무기고 옆에서 불침의 당번을 하고 있다. 그가 그 일생을 바치려고 생각하며 그렇게 오래동안 고생하여 찾아내어 모든 것을 희생한 나자렛의 이상을 잊어버리고 말았단 말인가. 인제는 그는 만인의 형제는 아니었을까.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애국심이 얼마나 강하다한들 그는 조국을 하나의 우상으로 만드는 것 같은 사람들의 친구는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유일의 천주밖에 알지 못하는 그는 「호가아르」를 제이의 고국으로 생각한 그는 그러한 인간은 아니다.
그는 프랑스의 전선에 참전하지 않았다. 이 이상 아프리카의 투사도 되지 않을 것이다. 1896년 6월 6일에는 클라회의 수도원에 가까운 오두막집 속에서 그는 이러한 금언을 써놓았다.
『모든 것을 뺏겨버리며 알몸으로 누군지도 모르게 피와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땅에 엎드려져 포악하게 괴외룸에 지쳐서 학살당하게 된다고 생각하여라… 그리고 그것이 오늘인 것 같이 원하여라…』
1930년 「베니아베스」에서도 그는 기록했다.
『어떠한 때라도 오늘 밤에 죽음을 기다리는 순교자와 같이 오늘을 살 것 항상 순교의 각오를 하며 성스런 어린양과 같이 털끌만한 저항도 안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것』
「타만라세트」에서도 그는 결코 금언을 변경하지는 않았었다. 그는 오래동안 마음 속으로 이 순교의 각오를 그 사상의 중심에 표지하고 있었다. 「트리폴리」 지방에서 높아지고 있는 위협도 그 자신에게는 생명의 희생을 부채질 해 일으킨데 불과하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피위에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하면 순교자들과 피를 나누지 않고서 그리스도교의 자격이 있을 것일까.
신부는 어느때이던 그리스도의 영광이 이 사막에 빛나게 되도록 「호가아르」의 지방에 그 피를 흘려바칠 각오인 것이다.
그는 방어소 속에 들어가서 무기를 바라본다. 그러나 이것은 그를 위해서는 아니다. 신부 자신은 순교를 갈망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신부는 자기 친구가 희생자와 순교자가 되는 것을 아무러지도 않게 보고있을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어소의 좁을 문을 들어갔을 때 신부의 가슴이 조이지 않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 우여곡절에 가득찬 인생이 이상한 모양으로 닫혀지려고 하는 것을 그가 모를리가 없었다.
이미 최초의 「회심」과 전우들 옆에 가서 희생이 되려하는 성소가 그를 쾌락의 생활에서 떼어놓아 「부우 아마마」에로의 전투에 던져버리게 했다. 그에 뒤이어서 그는 모록코에로 출발했던 것이다.
그는 명에서 싸여서 돌아왔으나 회심이 그를 새롭고 끝없는 모험 속에로 들어가게 했다. 그는 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다른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눈의 성모수도원에서 성심성모수도원에로 극빈을 찾아서 건너다녔다.
그 빈곤에로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어떤 노동자의 오두막집이 재빨리 그의 눈앞에 나타나서 나자렛의 아무도 모르는 오두막집에 다다르자 그는 휴식을 찾아냈다. 그곳은 아마 오래도록 저항할 수 없을만치 그를 이끌은 주지였으며 그는 조금도 그곳에서 나가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정적(靜寂)의 경지에 도달하며 밤에는 그 영혼의 속 깊이까지 올라갈 수가 있었다는 것은 나자렛에 있을 때였다.
그는 나사렛에서 그 일생에서도 가장 이상한 행복을 알았다. 그는 바라고 있던 것을 찾아내었다. 즉 예수의 마을에서 예수의 생활을 자기가 행했던 것이다. 나자렛의 생활은 샤르르 드 후꼬오에게 가실 수 없는 낙인을 찍은 것이다. 이것도 그가 얼마 안되는 보따리와 함께 언제든지 가지고 다니는 유일한 보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레스틴의 작은 마을에 파묻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순명에 의해서 천주께서 몇번이나 거듭해서 부르시는 강한 성소에 응해서 사제가 되기 위해서 그곳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그 모험 여행의 생활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전개된 것 같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물론 그는 같은 기구와 가난한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막과 고독과 울타리와 노동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틈이 벌어지게 될 것이었다.
그는 생활을 보다 완만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으나 만인의 형제라는 천직을 항상 더욱 넓게 개방하고자 하는 천주의 새로운 부르심에 항상 복종하는 것이다. 사하라에서 또다시 군대의 옛친구들과 만나게 되고 아라비아인과 「투아레그」인의 방문자가 있을 때에는 그는 세속을 떠나서 아무 소리없이 숨어서 몰래 있을 수는 전연불가능하였던 것이다.
해가감에 따라서 그는 또 사하라의 영광을 「호가아르」에서 발견하였다. 그것은 기묘하게도 모록코의 영광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이제 그는 자기 앞에 부우 아마마도 돌드 시디이 세이크족도 아닌 군주 이무라드와 반불주의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1881년에는 그는 의무의 의의를 재발견했었으나 지금은 그는 이미 수년래를 천주의 의의를 재발견하여 모든 것을 천주께 바치고 있었다. 그는 벌써부터 유혈의 각오를 한 하나의 사관은 아니었고 자기의 피를 바치려고 하는 일 신비가 이었던 것이다.
나자렛은 샤르르 드 후꼬오의 이상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바치는 최고의 이상이다. 그러나 만일 성인이거나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이상의 저편에는 반드시 천주께서 사람에게 원하는 이상이 있ㄷ자. 샤르르 드 후꼬오가 숭고한 금언과 같이 살은 말은 그의 모친이 죽을 때에 남긴 말이다.
『천주여 내 마음대로가 아니고 당신 마음대로 성취 되기를』 이 말이야말로 그리스도가 가르쳐주신 기구 「천주경」의 극치인 것이다. 이것은 오리와 동산에서의 그리스도의 최후의 기구이기도 하다. 이 기구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그것을 신성한 천국에 흡사한 세계로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즉시 인간세계의 진흙을 하늘의 황금으로 변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천주와 같게 되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한계를 부서버리는 것은 한정된 자기 의지를 천주의 의지와 바꿔버리는 데 있다.
참된 반항은 순명하지 않는게 아니라 순명하는 것이다.
샤르르 드 후꼬오가 이탈된 사랑에서 내던진 것 - 지식과 명예 - 을 천주는 그에게 다시 주었으나 이것은 참으로 예수의 샤르르 수사의 마음이 무엇하나 지상의 위대함에 집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며 이미 그가 갈망하는 것이라고는 천주께서 그에게 주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그순간에 천주께로 돌려드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