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기계와 같이 조종할 수 없고 그 미래행위를 정확하게 예지할 수 없다. 한시간 후에 어떤 행동을 취할지 미리 알 수 없고 기계와 같이 조종할 수 없는 인간성이 종교의식의 표현으로 증명되고 있다.
종교적 가치는 유한한 물질계를 떠나 심오한 어떤 초월한 세계에 속하는 영역에서 탐구되고 획득되고 있다. 인류역사는 인간 어느 사회에서도 예외없이 종교의식의 표현이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보편적인 현상이 동일한 것이 아니다. 종교의식을 가지각색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종교의식의 표현이 다양적이란 것은 독특한 사회환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각 사회구조는 간단없이 변천해가는 물질적 또는 사회적 주위환경에 적응해 나가기 때문에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그것이 완전한 정적(靜的)인 사회구조를 가지지 못하고 언제든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모임이 주위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현상이 자기네들이 인정하고 받들고 있는 가치에 대한 태도의 변화 즉 다시말하면 가치판단의 변화에 현저히 나타난다.
각 개인은 사회상호연락에 있어서 반드시 어떤 사회적 규율이나 가치에 맞추어 행동을 취해야 된다. 따라서 사회규율과 가치가 전체적으로 잘 체계화되고 종합되어 있으면 외부에서의 다른 가치가 특별한 유혹을 줄 수 없고 기존가치에 대한 의심을 가질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만일 사회균형이 흔들리고 파괴되면 여태까지 받들고 오던 가치에 대한 심각한 의아심을 품게 되고 동시에 밖으로부터 새로운 가치 추구의 대상을 찾게된다. 이와같은 사회가치에 대한 인간모임의 태도변경이 한 나라의 기존 종교(국민화한 것이건 아니건 전통적인)에서 다른 종교에로 국민이 넘어가는 지역에서 엿볼 수가 있다.
해방전후에 나타나는 천주교신자수의 차이를 보면 그 비례가 너무나 현저하다. 즉 1784년 북경사절 이승훈의 남경에서의 입교 영세와 그의 입국에 따른 교리전파운동이 1945년까지는 1년 평균 겨우 1천여명이란 수로 지연했던 것이 해방 후부터는 1년 평균 3만9천여명이란 수로 격증한 현실에는 틀림없이 이 판이한 사회적 환경이 그만큼 병행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먼저 이 문제를 다루기 전 개종 혹은 입교란 것과 사회불안정성(不安定性)을 뜻하는 사회적 위기란 두 용어를 파악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개종이란 것은 자기 생명에 기본적 문제에 관한 특별한 의식으로 일상생활을 좌우하고 개인 가산 또는 국가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종교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특히 유의할 점은
▲첫째 개종이란 것을 「프로테스탄티즘」에서 가톨릭으로 넘어 오는 것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신봉하지 않는 다른 종교인이나 무종교인을 총괄해서 알아들어야 한다.
▲둘째 종교개종이란 것은 흔히 정신적 긴장 혹은 사회적 위기 후에 따른다. 물론 이와같은 내적 갈등이나 외적 불안 등이 반드시 종교개종이란 것으로 결과한다고는 볼 수 없다. 자기가 처하고 있는 사회환경에 따라 적당히 심리적으로 맞추어 나감으로 불안을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사회가 무질서와 불안으로 덮여 정신적 고민이 지극하더라도 그것을 반드시 종교개종이란 것으로 해결한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한국에서 해방 후 격증한 천주교신자 수와 사회상태의 불안, 이 두 사실 사이에는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종교개종이란 결과를 빚어 낼만한 이유가 사회환경 속에 은폐되어 있었다고 본다.
불안한 사회환경을 특수용어로 표현하면 「소시얼 아노미」라고 한다. 개인의 윤리규범이 없어지는 동시에 이웃사촌의 인인애(隣人愛)라든가 민족의식이라든가 혹은 국민의 의무같은 사상은 송두리채 뽑히고 개인 개인은 사회유대성에서 벗어나 목적없는 생활 고독한 생활을 보낸다. 불안에 싸인 사회를 말한다.
좀더 상세히 말하면 이런 사회환경 속에서 전통적 규율과 가치는 각 개인에게 생활의욕의 상실과 삶에 대한 염증과 배타심을 일으키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대처할 새로운 사회적 규범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개인은 「무법천지」 불안 초조의 의식을 똑똑히 느끼게 된다.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전체적인 사회환경이 불안하다고 해서 반드시 그 해결을 종교의식의 재연 혹은 개종이란 현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너무 속단적이다. 따라서 해방 이후의 사회환경이 불안했다는 사실과 다른 부수적인 한국 톡특한 원인이 있어야 설명이 된다. 즉 다른 나라에도 해방 후의 한국사회 이상으로 불안한 사회를 가졌으나 가톨릭교에 입교한 사실이 현저하지 아니했다. 다시말하면 해방 이후의 한국사회환경의 불안과 천주교산자 격증 두 사실 사이에 반드시 무슨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는 대총적인 추측은 할 수 있으나 외국의 예를 보아 사회불안만으로는 반드시 종교개종을 초래했다고는 할 수 없고 불안한 환경을 전제로 하고 그 속에 부수적인 원인이 동반해야 다른 현상보다 종교개종이란 현상을 결과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부수적인 원인이 한국에 있어서 어떤 것인가?
생존경쟁을 해야할 바탕인 사회가 실망적이고 동시에 생활욕을 잃어버리게 되자 그 추구하는 가치 혹은 위안처라는 것은 자연히 물질계가 아닌 어떤 초자연적이라야 된다. 여기에서 종교의식이 강해진다.
그러나 종교라도 이미 경험해본 기존 종교(유교 불교)에로 다시 돌아가 착실한 종교생활을 하지는 않게 된다. 그 이유는 역사적으로 불교나 유교가 우리나라에서 정권투쟁과 경제가치 획득의 하니 도구로 사용된 때가 있고 따라서 그 본래의 교의를 상실한 감을 준다. 그뿐 아니라 일반국민이 이 두 종교가 현재 사회불안 경제빈곤 정치혼란 윤리퇴폐 등의 사상적 원인이란 인식을 가진다. 그러므로 좀 신기한 것 새로운 것을 찾게된다. 한국민에게 종교로서 새로운감을 주는 것은 불교나 유교보다 천주교나 기독교다.
이 가설은 전교신부와 문서포교기관이 한국보다 훨씬 많고 활발하지만 개종자의 수가 많이 뒤떨어지는 일본의 예가 잘 증명해준다. 본래 일본은 불교나 유교가 외국서 들어온 종교였지만 이들의 종교요소를 일본국민성에 알맞게 「신또이즘」이란 일종의 국민 전부가 받드는 국교화 되고 자기네들 종교라는 의식이 강하고 쉽게 새로운 종교를 선망하지 않게 된다.
해방이전까지 간접적 박해를 받아오던 포교활동이 활발해지고 국민이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빨라진 것이 신자 증가의 또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아무리 사회환경이 불안하고 종교의식이 강해지더라도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접촉이 없이는 신자 증가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사회가 생지옥이라고까지 하는 쏘련 중공 내의 천주교신자의 감소가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사회 불안과 그 결과가 종교의식의 재연이란 두가지 현상이 꼭 같은 두나라가 있다고 가상할 때 신자증감은 동적요소(전교하는)와 수동적요소(배우는)의 접촉빈도(頻度)와 정비례할 것이다. 한 예로서 최근 수년간 레지오 마리에 인원수와 영세자 수가 정비례함을 알 수 있다. 영세입교자가 전국적으로 우수를 보이는 부산이 가장 많은 레지오 마리에 단원을 가지고 있다.
또 한가지 신자증가의 원인은 한국민족성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제2차대전의 연합군의 승리가 국가독립전취와 긴밀한 연락이 있다는 점과 해방후에 주둔한 미군들의 영향이 그것이다 그들의 특별한 관심과 타인에의 실천이 한국민의 서방제국에 대한 우호적 태도를 앙양시켰다. 사상적 혼란기에 민주주의를 따르게 되고 민주주의의 사상적 뒷받침이 「크리스띠아니띠」이고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정신적인 무장을 「크리스챤」이 됨으로써 준비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이것은 만일 제2차세계대전이 초국가주의인 일본이나 독일의 승리로서 끝을 맺었다면 틀림없이 오늘날의 천주교 신자의 증가란 없을 것이다.
영세입교자 수를 성별로 나누면 거의 어느본당을 막론하고 여자가 남자보다 많다. 이 현상은 세계 어느나라나 비슷하겠지만 특히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이 현상은 과거 여권이란 것이 너무 경시되었기 때문에 남녀의 구별이 없이 인권 존엄성을 강조하는 천주교를 신봉함으로써 자기네들의 사회적 지위와 정신적 위안으로 삼는 것이 한국여성들의 독특한 태도인 것 같다.
연령별로 보면 비교적 젊은 세대가 노년기보다 많다. 이것은 사회불안을 뚫고 나가는 해결책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정력이 왕성한 점을 보아 종교적 전환은 소극적인 것보다 적극성을 띤 희망을 품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물질적 이익이라든지 하나의 출세술의 동기가 되는지는 알 수 없는 사실이다. 자포자기나 자살로서 사회불안을 해결하는 것에 비하면 적극성을 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세입교자의 직업별 차이에 반영되는 현상은 특히 부호한 상인이나 실업가가 비교적 적다. 이것은 물질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뿐 아니라 교회에서 요구하는 양심적 행활이 두려워서 꺼리는 점인가 한다.
지역적으로 보아서 도시에 더 많다. 이 현상은 단지 인구비례의 반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먼저 말한 동적 요소와 수동적 요소의 접촉이 빈번한 곳 즉 신부와 교회에 가까운 장소일수록 더 많다.
여기서 하나하나의 가설적 해명을 숫적 통계를 들어 증명하지는 않았지만 대략 최근 입고영세자의 증가이유가 이상과 같다. 여기서 하나의 학설을 시도하면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와 추구하는 가치는 언제나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끊임없이 찾고있는 것은 영원하고 안전하며 정적인 것이다. 현세 물질계 자체가 유한변천하는 것이라면 간단없이 탐구하는 인간의 대상이 현세에서는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인간 최고 가치는 현세를 초월하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할 때까지 사람은 흔히 부수적이며 피상적인 현세 물질가치로 노락되고 그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따라서 물질적부(物質的富)나 일시적 행복이 한 사회에서 보장되고 안전할 때 이같은 실수를 거듭 계속하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 반대로 재난(災難) 전쟁 기근 한마디로 사회불안이 발생할 때 비로소 현세의 허무함과 유한성에 눈을 뜬다.
쓰라린 생활고가 종교의식을 재연시키고 물질적 감각적 행복이 종교의식의 미래대상을 「카무풀라지」(僞裝)한다. 한국의 최근 천주교신자 증가는 정치적 혼란과 사회불안 경제도탄 그리고 무서운 전란으로 빚어진 가산파괴와 윤리쇠퇴를 통한 쓴 생활실험에서 찾아야 할 가치를 종교에서 구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을 지닌 조물주로서 이 양면을 잘 저울질 해나가는 추(錘子)와 같다. 그리고 저울추가 육신면과 영신면 그 어느쪽으로 내리고 오르고 하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환경에 많이 달렸다.
최근 한 국민이 물질면과 육신면에 대한 권태증에서 최고가치인 신에게로 옮기게 되는 저울추의 움직임이 영세입교자의 증가에서 능히 추측할 수 있다.
만일 종교적 가치가 진실로 인간생명의 목적이라면 한국민이 과거에 겪었고 지금도 당하는 현세적 물질적 불행이 다행한 일이며 어느 민족에 비겨서라도 가장 복받은 민족이라 할 수 있다.
李甲秀(대구대주교 비서 · 사회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