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들쳐볼 때 성인 반열에 든 사람은 거의가 다 수도자 아니면 성직자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읍니다.
평신자로서 성인품에 오른 예는 실상 드뭅니다. 세속에서 생활하면서 성인되기란 정말 어려운 것이겠읍니까?
영세 때부터 신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성인이 될 가능성을 받았을 뿐더러 성인이 되어야만 할 의무를 지니게 된다고 배웠는데 만일 교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세속에서 사는 평신도들이 성인품에 오르기에 이처럼 힘이 든다면 우리가 배운 교리는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까? 석연치 않은 곳을 밝혀야만 속이 쉬원하겠읍니다.
대저 중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성덕이란 수도생활과 밀접한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아왔던 것입니다.
세상이란 악의 소굴이고 따라서 열심한 신자가 되려면 가급적 세상을 떠나 수도자의 흉내라도 내는 척 해야되며 적어도 세속에 살면서라도 마치 세상을 떠난 것 같이 굴어야만 되는줄 알아왔읍니다. 이는 무리도 아니었읍니다.
당시 지도층을 맡고있던 수도자들은 평신자들의 사명이 자기들을 모방하는 것인 줄만 알았고 또 그렇게 가르쳐왔읍니다. 이렇게 하기를 수백년! 결국 평신자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사명을 깨닫지 못한채 그리스도의 신비체 내에서 일종의 허수아비라 할까 하여간 어린이 취급을 받아왔다고 말할 수 있으며 경제학적 말을 빌린다면 능동적인 생산자가 못되고 받아먹기만 하는 소비자의 탈을 쓰고 왔다고 할 수 있읍니다.
다행이 20세기 초부터 평신자들에 관한 이와같은 관념이 차차로 바꿔짐으로써 성세를 받은 자는 그가 세속생활을 하든, 결혼을 하든, 독신생활을 하든간에 누구나가 다 귀중한 사명을 띠고 있고 아무도 대처할 수 없는 구실을 맡은 존재로 성인이 될 의무를 지닌다는 사조로 접어들었읍니다.
아 고마운 일!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성덕을 지향하는 현대의 평신도란 어떠한 「타잎」(型)의 인간일까? 이의 해답은 몹시 궁굼합니다. 첫째는 현대(평신자) 성인형의란 자기 실생활의 구석구석마다 오 주 예수를 모셔가는 신자일 것입니다. 천주께서 인간의 두 발을 땅에 붙여 놓으신 이상, 천사가 되려해서는 결코 짐승도 되지 못하고 말지 모릅니다. 인간은 영혼을 갖고 있지만 역시 새끼를 먹여줘야 할 육신을 지닌 그리고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에 맞는 성덕이란 따라서 정신적 도덕적 육체적 가정적 사회적 직업적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오락적 이 모든 인간생활에 맞는 것이라야 합니다. 성덕이 인간 마음 안에 자리잡는 것이라면 인간 마음을 좌우하는 이 모든 생활면을 점령하는 것이라야만 합니다.
천주께서도 인류를 구속하시려 할 때, 영혼만을 끌어올리는 방법을 취하지 않으시고 당신 스스로가 인간 몸을 취하사, 인류사회 역사안의 일원이 되심으로써 인간이 당하는 것은 모조리(죄만을 제거하고서는) 체험하심으로써 실생활 전면을 치켜올리시고 성화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합치되었던 것과 같이 우리의 영적 생활과 실제 생활도 서로 합쳐야 되는 것이며 실제 생활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사건이나 문제도 영신과 더불어 관련을 맺지 않은 것이 없어야 됩니다. 신자 생활이란 주일미사에나 참예하고 때때로 성체조배 고해성사 조·만과를 드릴 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일을 할 때 사회활동을 할 때 사무소에서 공장에서 놀 때든지 사람과 담화할 때나 길을 갈 때도 여전히 신앙생활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자동차 운전을 하는 신자가 있다고 합시다.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신자든, 미신자든 간에 똑같은 방법을 쓸 것입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마음가짐이 어떻게 다르냐에 있을 것입니다. 즉 사랑의 정신을 가지고 남의 차를 방해하지 말고 횡단로에서는 보행자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크라숀」을 누르지 않고, 전차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에게 장해가 되지 않도록 잠간 정지했다가 지나가는 일들, 이와같이 우리 신자들의 성덕이란 실제 사회생활의 구석구석마다 실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란 자기 실생활 안에 예수님을 모셔들여가는 것으로 하루 24시간의 우리 생활을 예수님의 눈으로 보고 모든 것에 대하여 예수님의 머리와 마음으로 판단해서 예수님과 같이 실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 생활을 도모할 때 주일미사에만 참예함으로써 교인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일요신자의 누명을 벗어나 참다운 그리스도인 즉 제2의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신자의 열로 보나 또 그 회두수로 보아서 세계의 제 1·2위를 다투고 있고 주일마다 성당은 신자로서 꽉차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라파의 깊이 있는 신자에 비해서 볼 때, 왜 그런지 미성년과 같은 반쪽밖에 안 되는 기분이 듭니다. 한국 신자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신앙생활이 홀로 성사나 기구에만 치우치는 경향이 있읍니다. 성사나 기구 안에 계시는 천주님만을 맞이하는데 국한되었고 신비체 안에 생활하시는 그리스도로 맞이할 줄 모르는 점입니다. 신비체란 바로 우리 각자 신자요, 이들 신자가 24시간 동안 생활하는 사회, 가정, 동리, 길가, 이 안에서 우리와 더불어, 우리를 통하여 생활하시는 오 주 예수를 맞이하는데는 아직도 멀었고 생각조차 아니하는 사람이 있읍니다. 예수께서는 성당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니고 사회 각 처에, 우리가 가는 곳곳마다 우리와 더불어 생활하시고자 하심을 잊지 맙시다.
朴成鍾 神父(종군신부 단장 전국 JOC 지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