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議會(공의회) 神學顧問(신학고문) 한스.큉 神父(신부)의 結論(결론)
旋風을 일으킨 發言
옳은 改革의 歷史 繼續되어야 한다
발행일1963-05-12 [제374호, 4면]
■ 人間的 要素 때문에
위대한 「프로테스탄」 신학자 카알.발트가 언젠가 내게 말했다.
『자네들 가톨릭 신자들은 이상한 사람들이야! 자네들 가운데 어떤 이라도 자네들의 교회 안에 비뚤어졌거나 영영 곯아버린 것을 보려고 늘 애를 쓰다가 그것을 승인할 정도에까지 가서 자네들은 어떻게 하나? 자네들은 숨을 길게 한 번 쉬고는 그 메스꼬운 것을 한 입 삼키고나서 「그래도 나는 아직도 여전한 가톨릭 신자!」라고 말하지. 그리고 나서 아무런 일도 없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대도 그 따위 말을 들었지. 가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과 대조해서 개혁되지 않았고 갱신도 되지 않은 교회로 생각되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반드시 승인해야 할 때마다는 아니며 기껏해야 비판을 승인만할 정도이나.
근본적으로 고칠 수 없는-만사가 언제나 낡은대로 계속되는 구교(舊敎)로 생각되고 있다! 많은 비가톨릭 신자들에게 이것이 교회를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라고 믿을 수 없게 만든다. 교회는 오래되고 크고 세력이 있을 것이나 막대한 정도로 오 주의 가르치심을 잊어버리고 복음을 따르기보다는 세속을 더 얼른 따른다.
이런 말을 듣고 무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하고 그대는 묻는다. 교회 안에서 나쁜 일을 대했을 때 가톨릭 신자가 되기란 정말로 그것을 꿀떡 삼키는데 있는가?
틀림없이 가톨릭 신자의 자격은 그것을 삼키는 일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삼킨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자기들의 교회 안에 있는 그 못되고 거짓되고 부당한 일들을 참아서 관용하고 흔히는 입을 다물어 준다. 「프로테스탄」 신자들도 그런 일을 가톨릭 신자들보다 더 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인간 존재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인간 존재가 있는 곳은 어디서나 전혀 너무도 인간적인 요소가 있다. 악덕·미움·부당·그리고 악의(惡意) 등등의 요소가. 아무리 교회라도 인간을 가지고 천사를 만들 수는 없다. 그들이 손을 대는 모든 일, 그들이 실시하는 모든 일은 언제나 불쌍하게 허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적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남들이 나의 모든 고약한 인간성을 참아주고 내가 그들에게 끼치는 해독을 많이 삼켜주는 것과 똑같이 내게는 교회의 인물과 제도를 참아가는 수밖에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 批判만 하면 그만인가?
전번 편지에 내가 말한 것처럼 언제나 우리는 적시(適時)에 적처(適處)에서 비판할 수 없다- 가끔 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한다. 그러나 비판하면 그만인가?
그것이 자네가 질문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대 자신이 그 응답을 내놓아야지- 그저 비판만 해서는 그만이 될 수 없다. 집이 낡아빠졌을 때, 「도어」나 창의 나사가 헐거워졌을 때, 창틀이(밖에서나 혹은 안에서!) 부러졌을 때, 또는 회나 「페인트」가 벽 면에서 벗겨지고 있을 때, 그대는 어떻게 하나? 거기서서 유식한 비판을 제공하기만 하면 그만인가?
아니다. 서두러야지. 아마 그대는 쌓인 먼지와 쓰레기를 말끔히 쓸어 참으로 철저한 청결을 하고, 몇 군대는 못을 치고, 이것은 고치고 저것은 보강하여 대치(代置)와 갱신을 해야할 것이다. 집이란 언제나 갱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낡았을수록 거기는 할 일이 더욱 더 많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대는 알 것이다. 교회도 역시 인간들이 협력해서 세운 건축인 만큼 언제나 갱신과 혁신과 개혁이 필요하다. 물론 교회는 초자연적 「건추갣가」의 부동산으로서 당신께 속하며-그리고 언제나 속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당신의 종으로서 교회의 건축 사업에 참가하도록 허락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 그대로 있으면서 그들은 인간들이 하는 모든 일처럼 그 일을 잘 하기도 했고 못하기도 했다.
그들은 늘 그 일을 걱정하며 그 일이 항상 새롭도록 하며 당신의 계획대로 그리고 당신께서 만족하시도록 만사를 계속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오 주의 성의다. 이것은 답답한 강제가 아니라 즐거운 특권이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그 일을 위해 힘을, 우리 자신은 가지지 아니한 힘을 친히 주시기 때문이다.
■ 不斷히 改革된 敎會
「프로테스탄」에와는 대조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개혁되지 않는, 갱신되지 않는 교회라 함은 사실이 아니다.
종교개혁의 오랜 전에도 우리 교회를 갱신하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부지런히 일했던가를 그대는 아마 읽었을 것이며 적어도 들었을 것이다. 성경은 거듭 거듭 그 원문으로부터 대중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기성 역본은 개혁되었다. 강론, 교훈 그리고 신학은 거듭 거듭 새로운 국민을과 새로운 형식에 적응되었다. 미사의 전례는 거듭 거듭 바뀌어졌었고 갱신되었었다.
단 한 가지 예를 들면 미사는 「로마」서 처음으로 「그리시아」말로 거행되었음을 「그리시아」말이 그 당시에 대중의 언어이기 때문이었다. 2백년이나 늦게 「로마」에서 대중이 「라띤」말을 지꺼리자 「라띤」말이 「그리시아」말의 자리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타리에서 멀지 않아 「이타리」말이 「라띤」말의 자리에 소개되어 「라띤」말을 다시는 더 알아듣지 못하는 대중이 제대에서 행하는 독서·기도 영창을 다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며 자기들의 본국말로 독서·기도·영창에 참가할 수 있을 것이 가능하다.
초대에서만이 아니라 중세기에서도 이제는 부요하고 세속적으로 자란 교회를 갱신하려는 가지가지의 노력이 있었다. 독일 황제들은 이 갱신을 시작하였고 교황들은 그것을 계속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일은 수도회를 지도하던 또는 창립한 위대한 성인들은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다. 「끌레이르부」의 벨나도 성인은 「씨스테르시안」들과 함께 도밍고 성인은 「도미니칸」들과 함께 그리고 무엇보다도 견줄 데가 없는 「아씨지」의 프란치스꼬 성인은 「프란치스칸」들과 함께 교회의 개혁을 위한 일들을 했다.
비록 그럴지라도 여러 차례 공의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회 개혁은 중세기의 후기에 무너졌다. 여러모로 보아 그것은 교회를 위해서 좋지 못한 시대였다. 그런 사정이 루터의 거대한 항의(프로테스트)에로, 그의 모반에로, 그리고 마침내 그의 축출에로 발전되었다. 루터가 원한 것은 자체로서 좋았다. 그는 교회가 그 자체와 그 신학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맞도록 새로 구성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실지에 있어 딴 요소들이 있었고 그 요소 가운데는 적지 않은 정치적 요소가 있었다.
그래가지고 교회 개혁의 이름으로 거기에는 그대가 아는 바와 같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열교(裂敎=SCHISM)의 비극이 왔다. 가톨릭 교회는 내가 여기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여러가지 이유로 루터의 교회 개혁 방법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만일 실지로 복음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버릴 수 없는 많은 일을 루터가 버렸다고 말하면 족하다.
■ 갈려간 兄弟들을 생각하고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루터의 개혁을 거부했으나 결단코 일체의 교회 개혁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되려 루터의 뇌성벽력으로 일어난 과거 4백년 동안 교회는(가끔 한치한치씩이었을 망정) 굉장한 개혁상버을 수행했다. 교황 제도, 주교들, 사제들, 그리고 교우들의 개혁과 신학, 전례, 교회법, 신심행사들의 개혁이 그것이다. 종교개혁 시기의 아주 곤란받던 교회와 비교하면 오늘날의 가톨릭 교회는 굉장한 정도로 갱신되고 개혁된 교회다. 이제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은 가톨릭 교회와 루터 자신이 갈라졌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선의를 가진 모든 인간들은 교회가 그만치 갱신된 것을 충심으로 환희용약할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아직도 이 갱신과 정의 중간에 있다. 거기는 아직도 끝이 없는 정도로 해야할이 있다. 전례의 갱신, 성경의 독서, 신심행사, 신학, 사목 및 전료 사업-일체가 갈려간 그리스도 신자들과의 재일치를 생각하고 해야할 일이다.
그대가 보는 바와 같이 그저 삼키기나 그저 비판하기가 다 그만은 아니다. 거기는 행위가 또한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이 믿도록! 오 주께서 교회 안에 있기를 원치 않으시는 일들을 우리는 치워내야 하겠다. 오 주께서 교회에게 요청하시는 일들을 우리가 해야하겠다. 거기는 일자리의 부족은 없다. 그대는 협력할 생각이 있는가? 그 일을 어떠한 방법으로 하려는가를 그대는 생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