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51) 타만 라셋트의 방어소 · 은둔소 ②
발행일1962-10-14 [제346호, 4면]
후꼬오 신부가 「나자렡」에 머물러 있으면 그 정신적 위대함은 더욱 순수하고 완전하였으리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곳에는 지복이 생활이 있읍니다.』라고 「나자렡」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것은 휴식이며 환희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은 계속할 수 없읍니다.
나는 이 지복 속에서 잠자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같이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는 천주께서 몸소 나를 이곳으로 인도해주신 것을 마음 속에서 믿고 있읍니다. 천주도 나에게 이 감미로운 짐을 주셨읍니다. 그와 동시에 내가 그곳에서 떠나기를 천주께서 원하실 때가 가까워진 것을 알고 있읍니다.』
「나자렡」 을 포기하는 아프리카로 또다시 돌아올 준비가 다 되었던 서품식 전야에 그는 이와같이 말하였다. 그리고 현재 방어은둔소에 들어가기 위하여 오래동안 철야와 기구와 노동으로 세월을 소비한 이 「후리게에트」함에서 떠나려 했을 때 신부가 마음속에서 전에 하던 말을 되풀이 하지 않았으리라고 누가 믿을 수 있을 것인가. 「나자렡」은 그의 생활신조의 근본이라 하더라도 예수의 용자는 그 신조 위로 「나자렡」의 위로 한정없이 날으고 있다.
더욱이 샤르르 드 후꼬오가 예수를 발견하려고 사랑하는 것을 배운 모든 것 -울타리와 고독과 지식-을 끊어버리는데는 예수의 한마디 말씀으로 충분하였다. 그는 예수가 「나자렡」을 포기하듯이 그것들을 포기했다. 그러나 그래도 예수께서 세상에서 보내신 생활이 역시 「나자렡」의 생활과 같이 단순하듯이 사하라이 생활을 통해서 신부의 용기를 북돋아준 것은 항상 이 「나자렡」의 정신이었던 것이다.
신부는 예수가 백부장과 수세리와 사마리아인 회개안 죄녀들 옆에서 살아온 것과 같이 프랑스 사관과 투아레그인 옆에서 살아왔다.
신부는 지상에 있어서는 다만 한가지 「나자렡의 행복만을 원했을뿐」이나 이것이 싸움을 한 결과로 거절되어 있는 것이다.
신부는 은수자로서 세상을 버렸다. 신비가로서는 천주의 의지이외의 모든 것을 버리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무엇하나 단념하려고 하지 않는다. 세인은 현재의 생활이 천상의 생활과 같이 되어 천부의 의지로서 지배를 받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이 거절의 의지를 멸하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신비가의 힘에도 미치지 않는다.
예수와 같이 천주의 하인들은 세상의 이 비극에서 빠져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천주의 의지를 천주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전력을 기울여서 스스로 행하는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누구에게서 천주의 의지를 찾아낼 수 있을 있을가. 순교자인 성베드루와 성바오로의 생애
투사이었던 성루수와 성녀 잔 달크의 생애, 성마르땅과 쟝, 성 바프티스트 뷔안네의 생애 등에 빛나고 있던 것이야말로 참기 어려운 신비인 것이다. 천주의 의지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운명에는 인간과 공통된 척도는 없는 것이다. 성인들만이 성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호가아르」에 있어서의 드 후꼬오의 위대한 역설은 프랑스인의 그가 투아레그인의 수장의 친한 조언자이며 그리스도교의 사제인 그가 회교도의 수장부(首長簿) 사제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의 위대한 역설은 총 옆에서 불침의 당번을 하고 있던 그를 조금도 총이 지켜주지 않고 죽음이 찾아온 것이다.
무기는 이미 그를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타도하기 위하여 생겨난 것이었다.
신부는 방어소에서도 「후리케에티함」에 있을 때와 전혀 같은 생활을 했다. 매일 아침 항상 시종인 폴과 함께 미사를 봉헌한다. 폴은 전과 다름없이 영세지원자로서 처자와 같이 살고 있는 마을의 제리바(지붕도 없는 울타리 만으로 된 초옥)에서 매일 다녔다.
신부는 「투아레그」시집의 편찬을 재빨리 진행시키고 있었다. 일반 정세는 불온하였다. 군주(술탄) 아하무드는 뭇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기편이 되어달라고 강력히 재촉했을 뿐이었다. 아메노칼은 이 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에 충실한 「투아레그」인과 반불적 투아레스인들과의 관계는 무수한 방법으로 사적인 명의로 계속되고 있었다. 반불적 선전을 침투시키기 위한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한편 최초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메이니에 대령과 투클로 대령은 「자네」와 「폴리낙크」요색에서 철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0월에는 「호가아르」의 국경에서는 「트리폴리」방면에서 완전히 철병했다. 9월에는 신부로 「암제에르」의 농민이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 것을 들었다. 이 일을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후에 비로소 그것을 알았다.
12월 1일 신부는 방어소 속에 홀로 있었다. 그는 오래동안 편지를 썼다. 라페리이느에게 『이곳은 매우 평온합니다. 주민들의 행동은 말할 필요도 없이 만족합니다. 나는 벌써 시와 격언의 인쇄용 사본을 완성했다는 것을 당신에게 말했는지요. 이 일은 완전히 끝냈으며 인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모트린스키이 산문의 「텍스트」의 검토와 문법의 편찬이 남아 있읍니다. 이 문법에는 전부터 공포감을 느꼈으나 어떻게 해서든지 완성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겠읍니다.』
동생 마리에게는 『승리를 얻고나서 내가 프랑스로 돌아갈 때까지 너희들 전부가 건강히 있기를 바라며 그 때에는 네 앞에서 몇달 동안 즐거운 날을 보낼 수 있도록』
종자매 마리에게는 『우리들을 예수와 결합시키며 사람들을 위하여 바치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다.』
신부는 58세가 되었다.
그는 고독하였다. 한 사람의 동지도 얻지 못했다. 꿈꾸고 있던 2·3의 수도회도 전혀 창립하지 못했다. 그가 없게되면 그의 대리를 보려고 하는 작은형제와 사제 한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참으로 무로 돌아갈 것을 각오하고 있던 것이다. 위험과 시련과 헌신만이 아니라 그 육체와 마음 속 깊게 대단히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계획을 무로 돌려보낼만한 전면적 희생이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그는 참으로 십자가의 성 요왕의 제자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참으로 두 사람은 예수의 제자인 것이다.
예수가 드디어 부활의 승리를 빛나게 할 수 있었던 것도 고문의 치욕과 죽음의 공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정부정(正不正)을 불문하고 모든 인간적인 이유로서 고통과 헌신과 희생을 받아들일 사람은 많이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만이 구원의 종자(種子)로서 소멸을 받아 들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천주만이 죽음에서 부활을 전면적인 패배에서 승리를 끄집어 냈기 때문이다.
1916년 12월 1일 저녁에 드 후꼬오 신부는 혼자 방어소 속에 있었다. 폴 암베레크는 마을로 돌아갔었다. 「타만라셋트」를 아라비아인의 낙타병 두명이 지나갔다. 그들은 벌써 모티린스키요색으로 보낼 신부의 우편물을 가지러 올 때였다.
저녁 7시경 돌연히 신부는 방어소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 출신이며 「암제에르」의 농민인 엘 마다니의 목소리였다. 신부는 그 사나이의 편의를 보아주고 도와준 일이 여러번 있었다.
『우편물입니다』
엘 마다니의 목소리가 났다. 신부는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이때 억센손이 그를 잡았다. 누구인지 그를 결박하였으며 두손을 등에다 꽁꽁묶고 방어소 밖의 벽을 둘러싼 낭떠러지 위에 꿇어 앉힌채로 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