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백년전 1662년 8월 19일 볼래즈 빠스깔이 「빠리」에서 감방과 같은 장식 없는 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 석고상이 방금 세상에서 눈을 감은 그 얼굴 모습의 특색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빠스깔의 「마스끄」는 매우 아름다운 것 중 하나이다. 그것은 「마스끄」에 지나지 않지만 청춘 가운데 껶인 한 사람의 긴장되고 차디찬 표정이다. 그의 청춘은 전생애를 통하여 빛났고 정열적이었고 참을성이 없었다. 빠스깔이 39세를 임기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짧은 일생이기는 하나 그러나 빠스깔은 동시에 학자요 철학가요 시인이요 참 신비가였기 때문에 예외적인 운명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가 세살 먹었을 때 그의 어머니 안또와넷드 베공은 세상을 떠났다.
· 블래즈는 열두 살에 새로운 기술을 공부한다.
자기 아버지는 그가 이치를 따지는 것을 배우기를 원하였다. 『왜』 『어떻게』는 그가 친히 준 교육의 제일보가 되었다.
후개실의 붉은 벼루는 흑판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거기 직선과 원을 그었다. 삼각이 그의 주목을 끌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이전 300년에 예우글리드가 오랜 연구 후에 발견한 것을 연구해서 다시 찾았다. 빠스깔은 열두 살이었다.
· 자기 아버지를 도우기 위해 빠스깔은 기계를 만든다.
그는 제4 「다이멘션」을 발견하였다. 또 열여섯 살에 원추곡선(圓錐曲線)에 관한 책을 내었다. 그 시대 가장 위대한 학자들이 그의 말을 듣고 의견을 청하고 데깔뜨, 로벨발 가센디, 펠마 등이 그와 더부러 서신을 교환하였다.
· 물리학에 개혁 진공의 발견
기하와 수학을 공부한 후 지금은 물리학을 공부한다. 그는 진공과 기압에 대하여 이태리에서 또리체리가 실현한 실험에 마음을 쓴다.
인력(引力)에 관한 거부할 수 없는 증명을 주었다. 그는 기상학과 정수학(靜水學)에서 그것을 응용했으나 19세기 혹 20세기에서만 그 완전한 발전을 보게되었다.
· 볼래즈 빠스깔의 궁전생활 도박과 장래걱정
1653년 빠스깔이 설흔살이 되었을 때 그는 도박에 지나치게 열중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 대한 어떤 문제로 빠스깔의 주의를 촉진시켰다. 그리하여 이 위대한 정신 소유자는 공산(公産)의 계산에 또한 19세기 20세기에 그 완전한 발전을 보게될 계산에 기초를 마련하였다.
· 천주와 만난 그날밤
빠스깔이 성서를 읽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갑자기 그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천주가 그와 함께 거기 계셨다.
그것은 문구(文句)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학가나 학자들이 이렇듯이 쉽게 말하는 천주께 관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현존에 관한 것 인격(뻴소나)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기쁨이 우리에게 넘치기 위하여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신 천주께 관한 것이었다.
· 한 비밀기사(記事)
빠스깔은 동요 가운데 수도원에 은퇴한 학자들을 발견하였다. 사람들은 아놀이 보호한 얀세니우스의 작품을 유죄선언하였다. 빠스깔은 그것을 바루어야만 했다.
그는 반대자들에게 그 반대의 이유를 묻고 그 다음에 그들을 아유한다. 성공은 벼락과 같았다. 수백만 독자가 저자의 싸인없이 이 편지를 읽었다. 그는 너무 연약하게 나오는 예수회를 조소했다. 어조(語調)는 올라갔다. 빠스깔은 잊어버림을 받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야기하였다.
· 미완성 까테드랄인 「빵세」
1658년 그는 일년동안 신앙의 훌륭한 증거 가운데 모아둔 「노트」의 요소를 편집하였다. 이것이 미완성의 「까테드랄」인 「빵세」이다. 여기서도 빠스깔은 혁명적인 사업을 이루어 놓았다.
그는 쾌락의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는 영광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이성(理性)의 힘을 의심하였다. 무한한 두가지 문제가 그에게 불안을 주었다.
종교와 천주를 버려야만 하였다. 그것을 시도(試圖)해야만 하였다.
도박은 증거가 아니다. 그는 증거를 성서에서 인용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는 중심 자리를 차지하였다. 빠스깔은 「양세니즘」과 결별하고 그리스도의 교회 재판에 순종하였다.
· 마지막 발견과 죽음
1658년 그가 「빵세」의 초고를 쓸 무렵에 「빠스깔」적 학적사상의 불꽃의 마지막 꽃다발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미적분학(微積分學)의 선구자의 대열에 한자리를 차지하면서 패선(패線)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렇게 그는 파잎니즈와 뉴튼의 조상(祖上)이 되었다.
불상한 사람을 도우기 위해 그 재산을 분배하였다. 그는 싼 값으로 시민들을 도시 이쪽에서 저쪽까지 빨리 모셔주는 합승자동차회사를 「빠리」에다 조직하였다. 「빵세」의 저자가 불란서에서 처음으로 합승 운수업을 주장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아니한가? 임종이 가까이 온 것을 깨닫고 가톨릭신부를 모셔오게 했다. 그는 그에게 교회에 깊은 복종을 선언하고 성사를 영하였다. 그는 39세의 일기로 8월 19일 새벽 한시에 눈을 감았다.
· 빠스깔의 현대성
불란서 작가 가운데 빠스깔보다 더 현대적인 작가를 오늘 나는 거의 보지 못한다. 몽때뉴와 볼때래나 위고의 비관주의 꼬르네이의 윤리 라신에 의한 사랑 이 모든 것이 거의 우리에게 관여함이 없다. 이 작자들은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우리에게 우리것이 아닌 세상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그러나 빠스깔은 우리 지성에 우리 마음에 이렇듯이 더 가까울 수가 없다.
구라파에 고민이 다시 나타나고 인류가 원자폭탄과 부정이 위협하에 사는 이 시기에 그는 우리 각자를 위해 써준 것 같다. 『우리는 매일 각자의 본처지를 그와 비슷한 처지에서 보게하는 다른 이의 눈에서 괴로워하는 쇠사슬에 묶이고 사형 언도를 받은 많은 사람들은 상상한다.』고 그는 쓰지 아니했던가? 인간 처지를 이렇게 보는 것이 우리의 반세기의 그것이다. 그 환상은 까뮤의 『페스뜨』와 우리시대의 영화처럼 우리시대의 소설을 고취(鼓吹)한다.
그위에 모든 현대 철학은 우리 처지의 불합리 위에 가치를 올리고 그것을 발전시키기만 한다.
빠스깔은 이세상을 항상 무시 아니했고 또 거기서 자기 정신을 높이기 위해 살았다는 것이 우리 마음에 든다. 만일 그가 처음부터 천주께 있었고 그의 첫 결심을 교만이 아니고 겸손이 고취하였고 예수회원들을 불멸의 초상처럼 보지 아니했고 자기누이동생 작글린이 「뽈 로이얄」에 수녀가 되었을 때 울지 아니했던 그는 우리를 덜 감동시켰을 것이다.
그가 이세상의 부름과 도박과 여자와 세상사를 절대로 몰랐다면 그는 이렇듯이 우리와 가깝지 못할 것이다.
만일 최후의 목적에 관하여 이야기 하기 전에 수학과 기하와 물리학의 선생이 아니었다면 그의 변증법이 우리를 덜 납득시켰을 것이다. 한말로 빠스깔의 회개는 이 천재가 「불의밤」을 거쳐 오랜 투쟁 후 천주로 인해 정복되었기 때문에 그 큰 의의가 없다. 빠스깔은 오늘날 현대인으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그는 이치에다 증거를 근본적으로 대치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빠스깔은 현대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작품 속에 생활한 현존과 놀랠만한 접근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진리에서 증거한다. 그는 진리를 추론하지 아니한다. 그에게는 모든 토론에 금지된 가정(假定)이 없다. 오직 눈물과 기쁨 가운데 생활한 경험이 있을 뿐 다마르로와 같이 빠스깔에게도 사상은 사고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생활하기 위해서 형성되었다.
초성생명(超性生命)을 벌이(得)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이는 진공(眞空)의 존재를 보이고 미적분학의 기초를 들 줄아는 이라고 하는 것을 보증하였다.
그의 말은 이상하게도 현대적이다. 너무나 현대적이기 때문에 때로는 이러 저러한 현대인의 말과 혼동 할 수 있다. 예컨데 샬뜨르와 꺄뮤 훨씬 이전에 세상의 불안정 불합리 생활의 나약성을 체험하였다. 사실 『우리는 넓은 환경 속에서 언제나 불안정하고 불확실하고 이쪽에서 저쪽에 밀리면서 항해하고 있다. 우리를 붙들고 우리를 견고히 하기 위해 우리가 생각하는 몇마디를 그는 놓치게 하고 미끄럽게 하고 영원히 못잡게 한다.』고 그는 쓰지 아니했던가. 빠스깔은 약속된 문학의 창조상이다. 지나가고 멸망하는 이 세상에 약속되지 아니하고 또 우리 각자를 위해 이미 시작된 영원 속에 약속된 세상에서.
■ 빠스깔이 略歷
▲1623년 6월 19일 「끄레르몽 페랑」에서 탄생
▲1626년 빠스깔의 어머니 별세
▲1631년 그의 집안이 「빠리」로 이주
▲1635년 유크리드의 기하학의 첫부분의 하나를 발견함
▲1639년 「루앙」에서 임관(任官)됨
▲1640년 『원추형론(圓錐形論)』 발간
▲1642-1644년 계산기의 작도(作圖)
▲1646년 진공(眞空)에 대한 첫 실험을 함
▲1647년 빠스깔이 병들어 「빠리」에서 그의 누이 작크린의 간호를 받음
▲1648년 「쁘이드돔」 산위의 경험을 하다
▲1651년 그의 아버지 별세
▲1652년 누이 작크린 「뿔또 로이알」수도원에 입원
▲1654년 11월 23일 회개(悔改)의 밤
▲1656-1657년 『레 쁘레멩시알』 출간 (LES PROVINCIALES)
▲1658년 『패선(패線)』(LA CYCLOIDE)의 문제를 해명하고 『명상록』(LES PENSEES)을 시작
▲1659년 그의 병세가 가중함
▲1661년 누이 작크린 사망
▲1662년 3월 18일 송(合乘選送) 개시
▲1662년 8월 19일 빠스깔 사망
黃敎仁(빠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