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角圈(시각권)] 旋風(선풍)을 일으킨 發言後聞(발언후문)
한스.큉 發言에 領分을 벗어난 言辭
아르 主敎 辛辣한 批判
발행일1963-05-19 [제375호, 1면]
독일 「퇴빈겐」대학 한스.큉 신부의 서간 형식으로 된 논설을 「선풍을 일으킨 발언」이란 「타이틀」로 역재했었다.(가톨릭시보 372·374) 이 논설은 지난 3월 교회 출판 허가를 얻어 뉴욕에서 출판된 그의 저서 「세상이 믿도록」의 골자이며 「바티깐」 공의회가 당면한 문제를 가장 적절히 해설했다(싸인誌 2月)는 편집자의 주석이 있었다.
한스.큉 신부는 5주간 미주 여러 곳서 강연행각을 하던 중 그의 견해는 많은 찬성을 받았지만 동시에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트랜톤」의 죠지 W 아르주교(뉴.저시)는 한 구라파인 신학자가 그의 영분(領分)을 넘어선 말과 무의미한 소리를 했다고 비판했다. 동 주교는 5월2일부 「멧센자」지 보도기사에서 「퇴빈겐」대학의 한스.큉 신부란 이름을 듣지 않았으나 명백히 그를 지적하였다. 한스.큉 신부는 「교회와 자유」란 토론 제목을 내걸고 한결같이 교회 안에 광범위한 개혁이 필요한 것을 강조했었다. (더·원더러紙)
아르주교는 「뉴·저시」 「스프링·레이크」에서 거행된 성명회 연합회 연차회의 오찬석상에서 『우리는 이면 구라파인 신학자로부터 교회를 어떻게 운영해가고 교회가 무엇을 잘못한다는데 얼마간의 충고를 받았었다』고 한다음 『이 사람은 본래 「프로테스탄」 신학자 칼.바트에 관한 연구로 저서를 내어 명성을 얻었다. 이것이 그를 칼바트에 관한 권위자로 만들었지만 가톨릭교회를 어떻게 운영한다는 것은 아니겠는데 그가 교회를 어떻게 운영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려하거나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거나 하는 것은 그것은 그가 자기 직분을 벗어난 짓이다』라고 말했다.
아르주교는 동 신학자의 지식·경험 및 사고(思考)를 의심했다. 동 신학자가 내세운 것들 중의 그 어떤 것 가운데는 「모순들」도 있다고 동 주교는 말하고 있다. 그런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데 그 연고는 그게 다 「무의미」한 소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령 『교회의 성질(性質)과 비성질(非性質) 또는 개인의 자유와 비자유(非自由)』라고 한 한스.큉 신부의 말을 인용하였다.
『여러분이 이런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마음쓸 것은 없다. 누가 어떤 곳에서 와서 우리가 알기 어려운 말을 늘어 놓을 때 우리는 그가 똑똑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것 제법 심각하구나 하는 정도로 들어두면 그만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바로 「넌·센스」란 것이다. 거기 한 의문을 세울 일이 있다』고 동 주교는 청중들에게 『국내 국외 신학자를 가릴 것 없이 그네들이 하는 말을 비록 좋은 출판사가 내놓은 것일지라도 전부 다 받아들일 것은 없다』고 말했다.
『최후에 가서는 천주성신과 건전한 상식이 득승(得勝)할 것이며 교회는 교회의 명백한 벗과 분명한 적을 측정하리라. 그동안은 천주 성신께 공의회를 성공으로 이끌어 주시도록 열렬히 기구해야 한다는 것은 아마 여러분은 곧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고 맺었다.
우리는 이 주교의 논평이 어떤 것을 지적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듣는 청중에 따라서는 잘못 듣는다기보다 전혀 옳지 않을수도 있다. 이런 이론은 단지 청중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어떤 뜻으로 비록 그 말을 알아들을만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해석을 달고서 그칠 문제는 아닌 것이다. 듣는 청중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오(誤)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듣는 청중에게 그런 종류의 오(誤)를 유발시켜서도 안 될 일이다. 이 점은 신중히 다루어졌어야 할 일이다.
신중이 다룬다는 생각은 아마 사목적(司牧的)이요 교육적인 뜻을 포함한 것이 되지 않을까?
아로주교의 논평은 극히 신중한 사목적인 논평인 것같이 보인다. 사실 한스.큉 신부의 글을 실었을 때 독자들의 반영은 적지 않았다. 마치 교회 안에서 새로운 논평의 풍토(風土)라고 할까 그런 방식의 자유발랄한 비판의 「무드」가 생겨난 인상을 주는 같았다. 그런데 주목할 일은, 그 글의 어떤 대목만을 쳐들어, 말하자면 자기 구미(口味)에 맞는 말의 구절만을 집어내는 연소한 독자층의 반영에는 한편 위험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없지 않았다.
가령 어느 논지(論旨)의 전후는 잘라 버리고 비단 그것이 한 줄의 글은 된다고 할지라도 그 토막만을 내세운다면 필자의 의도(意圖)와는 동떨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긴 글을 써내려 가자면 어떤 구절에 가서 좀 강한 표현을 집어 넣을 수 있다. 그게 아마 문장의 「악센트」란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그 부분만을 꼭 잘라서 찬·반의 논평을 가한다는 것은 그것이 어느 판결문(判決文)이 아닌바에야… 그 또한 옳은 논평의 태도는 못 될상 싶다.
사실 한스.큉 신부의 글에 새삼스런 발설(發說)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많이 떠돌던 말이 아니었던가 한다. 좀 다채롭게 꾸며 놓은 정도인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아르주교의 다른 방면에서의 신중을 요구하는 사목적 견해를 들어볼 때 경솔히 한편에만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는 경계심을 일으켜 주는 것이 있다.
교회 안에 학문의 자유는 항상 보장되었으며 또한 보장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일반 대중에게 더 중요한 것은 강론 및 사목(司牧)의 말씀은 그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