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는 행동하라면 그저 겁을 먹는가하면 어떤 이는 생각도 안해보고 뜻도 세우기 전에 덤벼드는 이가 있읍니다.
천주께서는 우리가 누워서 지내라고 마련하지 않으신 이상 누구나가 활동을 통하여 천국 건설과 인간사회 건설에 종사해야 하겠읍니다.
그런데 행동에는 여러 종류가 있읍니다. 동물도 움직이고 사람도 움직이고 신자도 움직입니다. 동물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고 사람은 자각(反省)에 따라 움직이고 신자는 믿음에 따라 움직입니다. 우리 행동에 최대의 가치와 결실을 부여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행하시도록 마련할 줄 알아야겠읍니다.
집을 부수기는 쉽지만 짓기는 힘듭니다. 남을 평하기는 쉽지만 자신이 행동하기는 힘듭니다. 남을 비난하는데 시간을 다 보내면 행동할 시간은 없어집니다.
철저한 계획도 좋지만 왼만하면 실천 옮기는 것은 더욱 좋습니다. 머리 속에서만 지었다 헐었다 하는 궁전보다는 한 칸의 판자집이 더 소용에 답니다. 외향이 제 아무리 좋고 높아도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한 아무 소용 없읍니다.
우리는 흔히 일이 너무 벅찰 것이라고 하품만 할 때가 있읍니다. 완전 포기보다는 조금이라도 행하는 것이 좋겠읍니다. 쓰지 않는 근육은 위축 당하듯이 행동하지 않은 사람은 진보는 커녕 후퇴하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완성도 행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아무렇게나 행동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살펴봅시다. 좀 나아질가하고 그저 돌아다니며 말 많이하고 신경과 인상까지 써가며 다투고 무척 애를 쓰다가는 실망합니다. 노력에 비해서 결과는 너무도 미미한 까닭입니다.
인간행동의 효과는 얼마나 많이 움직이느냐에 달리지 않고 행동을 뒷받침 하는 정신의 무게에 달렸다는 점을 잊은 탓입니다. 동물의 행동은 본능적이고 사람의 행동은 자극적이라고 했지요!
우리들의 행동이 동물의 그것과도 같이 기계적으로 돌아가지 않나 반성할 때가 왔다고 봅니다. 때로는 사람답게 반성도 하고 자율적으로 움직일 때도 있겠지만 과연 믿음을 토대로 신자답게 살아보는 시간이 얼마나 될른지 심히 궁금합니다.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고쳐나갈 때 인격적인 사람이 되며 내 생활을 믿음에 비추어 적응할 때에 천주님의 자녀가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생활 방법은 나에게만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남에게도 그들의 본능적인 생활을 자각적인 것으로 이끌어주고 자각적인 행동으로부터 믿음의 생활로 옮겨줌으로써 차차 인간의 모상과 천주님의 자녀의 모상을 찾아주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와같이 가치 있는 행동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우선 실제생활을 똑똑히 관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이를 지혜라고 부릅니다.
사물을 바로 보고 필요성을 정확히 파악한 다음 자기 힘에 알맞게 적당한 장소를 골라 파고드는 것이 지혜라는 것이고 이와 같은 행동이 믿음으로 뒷받침 될 때는 이를 생활한 신앙 또는 착각의 모면(흔히 신앙 생활에는 헛된 주관과 감정때매 오랫동안 착각 속에서 헤매는 수가 많습니다) 나아가서는 현대적인 성덕이라고 불러도 좋겠읍니다.
실제를 떠난 신앙 생활은 하지 말 것. 믿음도 상식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읍니다. 구체 생활에 맞부딪쳐 주의 뜻을 타진해보는데 습관되도록 천주님은 이에대한 해답을 주시고야 말 것입니다. 믿음의 정신으로 실제 밑에 굴복하는 것은 곧 천주께 굴복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는 성경에만 실려있지 않고 천주께서 내게 주신 인사물(人事物) 현상 안에도 숨어있는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비극은 눈뜨고 못보고 빛을 받고도 판단할 줄 모르는데서 그리고 당치 않은 곳에서 허발질하는데 있읍니다.
끝으로 우리 생활에 최대한의 효과를 붙여주는 비결을 알아 둡시다. 나의 국한된 의지를 천주님의 무한한 뜻으로 바꿔놓을 줄 알 것 이때에 천주님은 나의 가련한 힘을 당신의 무한한 전능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천주님은 하치않은 것으로서 큰 일을 치루십니다. 우리 생활의 효과를 제재하는 것은 바로 내 자신의 힘만을 믿으려는 방해공작입니다. 내 자신이 줄어지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커지실 때 우리같은 존재도 성부의 계획을 완수하는데 한몫을 볼 것입니다.
朴成鍾 神父(종군신부 단장·전국 JOC 지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