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尹亨重 神父님의 華甲을 맞이하여 / 柳洪烈(서울대학교 교수 사학가)
出版布敎 先驅者
한국 가톨릭언론계의 개척자이시며 거성(巨星)이신 마두.윤형중 신부께서는 지난 4월28일로써 화갑(華甲)을 마지하셨다. 이 즐거운 때를 마지하여 한국 가톨릭언론계에 끼치신 윤신부님의 공적을 살펴봄도 뜻있는 일이라 하겠다.
윤신부는 1903년 4월29일에 충북(忠淸北道 鎭川郡백 谷面 龍津里=現龍_里)에서 출생하셨고 1908년에는 경기도(安城邑 崇仁洞)으로 이사하시고 1917년에 용산 신학교에 입학하시어 1930년에는 영예의 사제신품을 받으셨다.
어려서부터 체질이 허약하시었던 윤신부는 신학교의 학업을 순조로히 마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천주님의 안배와 신부님의 굳은 의지로 목자의 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다.
사제위에 오르신 윤신부는 곧 그해에 서울 중림동 성당의 보좌신부로 취임하셨으나 그의 명석한 두뇌와 유창한 필제가 인정되어 1933년에 가톨릭청년사의 사장으로 피임됨으로써 가톨릭언론계에 투신하셨다. 때에 경향잡지사 사장이시던 바오로 한(基根) 신부께서는 윤신부의 재질을 간파하시고 그의 후계자로서 윤신부를 육성하시다가 1937년에는 그 자리를 윤신부에게 넘겨주시고 1939년 10월에 71세의 고령으로 별세하셨다.
이리하여 가톨릭청년사장 경향잡지사장의 적을 맡으신 윤신부는 1936년부터 서울교구의 출판부장직을 겸하시고 교회의 온갖 서적을 발간하는 총책임을 지니시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말미암아 허다한 난관에 부닥치게 되어 「가톨릭청년」은 한때 발간을 정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난관을 무릅쓰고 윤신부는 「경향잡지」 및 각종 성서의 발간만은 꾸준히 계속하여 토대를 반석우에 놓으시고 손수 잡지의 편집 원고의 집필 및 그 청탁 교정 등 온갖 어려운 일을 도맡아 보시다가 즐거운 민족의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방과 더불어 「경향신문」이 발간되게 되니 윤신부는 1946년 동 신문의 부사장으로 취임하사 가톨릭 정신에 입각한 날카로운 필봉을 폄으로써 사회의 목탁이 되시고 민족을 혼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던 좌익의 파괴공작을 제지하는 일에 앞장이 되게되었다.
이어 尹신부는 1947년에는 경향신문사 장대리로 피임되고 1948년에는 동 신문의 고문이 되었으나 불의의 6·25를 겪은 후는 광폐화한 경향잡지사 가톨릭청년사의 개건에 심혈을 기울이셨다.
이때 尹신부는 그의 후계자를 육성할 필요를 느끼어 「로마」 유학으로부터 귀국한 모신부와 더불어 출판사업의 발전을 꾀할 생각이었으나 뜻밖에도 그는 1959년 5월에 안성군 미산리 성당의 본당 신부로 전임됨과 아울러 서울교구에서 간행하던 「경향잡지」는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CCK)로 넘겨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리하여 尹신부는 전후 27년동안 손수 기워오고 발전시켜오던 「경향잡지」에서 섭섭히 손을 떼고 사제서품 후 처음으로 지방본당을 맡게되었으나 1961년에는 한국 순교자의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서울 청파동 소재의 한국 복자 수녀원의 지도신부로 전임되게 되었다. 바로 이때 복간된 경향신문이 운영상 난관에 빠지게 되니 尹신부는 1961년에 동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가 동년 말에는 이를 사임하게 되었다.
상술한바와 같이 尹신부는 사제생활 33년 동안에 있어서 거의 30년 동안을 오로지 가톨릭언론기관에 재직하여 정의와 평화를 위한 언론창달(言論暢達)에 헌신하여 왔으나 한편 그 사이에 있어서(6種)의 저서와 많은 논설을 간행발표하게 되었다. 저서로서는 「宗敎의 根本問題」 「韓國 가톨릭 指導者」 「詳解天主敎料理 上中下 3券」 「1時間의 __」 「四末의 노래」 「眞理의 證言」이 있고 투고한 간행물로서는 京鄕新聞, 思想界, 新世界, 東亞春秋, 軍宗, 새길 女_ 女像들이 있다.
이러한 저서 논문을 통하여 윤신부는 진리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한편 서울 수복후는 명동주교좌 대강당에서 주로 지성인을 대상으로 한 공개교리 강좌를 거듭 개최하여 많은 때에는 천여 명이 입교 예비자를 가르치게 되었고 복음 수녀원의 수녀들을 동원하여 저명 인사들에게 전교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많은 지성인이 천주교로 개종하게 되었는데 그들 가운데 가장 이름날이는 불교도 학자이던(六堂 崔南善)씨와 소설가이던 (橫步 廉想涉)씨었다. 해방 후 특히 현저하게된 교우의 격증은 이러한 언론 및 강좌의 영향이기도 하였다.
윤신부는 한편 1946년 이래(韓國殉敎者顯揚會)의 위원장직을 맡으사 동 회기금의 모집 순교지의 매입기념탑의 건립, 순교사(殉敎史)의 발간 등을 수행하는데 큰 힘을 기울이었다.
그리하여 서울에서는 한강가의 새남터와 절두산(切頭山)에 기념탑이 세워지고 본인에 의하여 「한국 천주교회사」가 발간되게 되었다.
이렇듯 尹亨重 신부는 사제서품이래 33년간을 두고 오로지 가톨릭언론의 창달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여 사회의 목탁이 되었으므로 정부에서도 그에게 문교부 종교문제심사위원회위원, 법무부재소자교화대책위원회위원 재건국민운동본부중앙위원회위원을 위촉하게 되었다. 앞으로 윤신부의 건강이 더욱 좋아져서 언론문필을 통한 이나라의 성화사업에 보다 많은 공헌이 있으시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이상과 같은 윤신부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서울주재 가톨릭 문필가들은 5월5일 그의 수연을 베품과 아울러(화갑기념 논문집)을 금년 내로 발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논문집에는 가톨릭의 신학 철학 문학 여사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음악 미술 등 각 방면에 걸친 논문을 게재하기로하고 그 원고마감을 금년 9월말까지로 정하였는데 전국의 모든 가톨릭학자 문필가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요망되고 있으며 원고지 2백자 백매 이내로 집필하여 주기를 바라고 있다.
柳洪烈(서울대학교 교수 사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