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끝) 타만 라셋트의 방어소 · 은둔소 ③
발행일1962-10-21 [제347호, 4면]
그곳에는 주로 「켈 아제에르」와 「켈 자네」에 속하는 「투아레그」인이 30명쯤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농민들이 몇명들어있었다. 그러나 「타만라셋트」의 주민은 한사람도 없었으며 그리스도교의 「은수자」의 친구인 「투아레그」인도 한사람도 없었다. 이들 전부가 「세느시스」교였으며 군주아하뭇드의 유격병들이었다.
몇분후 그들 가운데의 멸이은 폴 암바레크를 끌고왔다.
그들은 폴을 바로 문 옆에 신부에게서 멀지 않는 곳에 꿇어 앉혔다. 그들은 방어소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을 다 꺼냈다.
밤의 정적 속에서 꺼낼 수 없는 물건을 깨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부는 아무말도 안했다. 그는 15세의 「켈 아제에르」족의 소년 세르미 아그 토오랴의 감시하에 있었다. 신부는 일생동안 묵상해온 그 때를 직면했던 것이다. 그는 죽음과 그리스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돌연 습격이 있었다. 점심때가 지나서 마음을 지나간 두 사람의 낙타병이 아무소리도 못듣고 아무것도 모르고 우편물을 가질러온 것이다.
두 사람이 나타나자 「세느시스」 교도들은 황급히 헤어져서 두 사람의 아라비아인들을 사방팔방에서 쏘았다. 신부의 옆에 혼자 남아있던 세르미 아그 토오라는 미친듯이 날뛰었다. 포로가 된 신부가 달아날가 두려워함에서인지 총구를 뻗쳐들고 한발 쏘았다. 탄환은 오른쪽 귀에서 왼쪽 눈으로 빠져나갔다. 단 한발이 신부를 쓰러뜨렸다. 그의 몸은 결박당한채 천천히 땅위로 쓰러졌다.
탄환은 방어소의 왼쪽 입구를 지나 탑의 벽에 남아있었다.
두 낙타병 부 아이샤와 부우제마 벤 브라히므는 신부와 거의 동시에 피살 당했다. 사격하는 소리에 동리의 농민들이 달려왔으나 때는 이미 늦었고 또 그들은 무력해서 싸울 수도 없었던 것이다.
폴 암바레크 자신도 만일 마호멧트 벤 발카라고 하는 사람이 그를 위하여 변호하며 보증인이 되어주지 않았더라면 생명은 없었을 것이다. 밤중동안 「세느시스」교도들은 부우 아이샤의 낙타고기로 연회를 열고 방오소 속에서 잤다. 아침이 되어 또한번 습격이 있었다. 다른 아라비아인의 낙타병 쿠이데르 멘라크하르가 「모티린스키」요색에서 우편물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그도 습격을 당해서 그자리에서 피살당했다.
그래서 드디어 습격자들은 「타만라셋트」를 떠나 「트리폴리」지방으로 돌아갈려고 「쿠디아」를 건너서 급히 떠났다. 농민들과 폴은 금해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끈도 풀지않은채로 신부를 방어소의 구렁에 묻었다. 그날로 폴과 한사람의 농민이 「토터린스키」의 요색으로 드 라로슈 대위에게 알리러 달려갔다.
대위는 습격대의 추적을 하기 시작하여 12월 17일 「큐디아」에서 그들을 추적하여 약간명을 타도했으나 나머지는 따라가지 못했다. 그는 12월 21일에 「타만라셋트」에 들어가서 신부의 유해를 덮고 있는 흙 위에 십자가를 세워 놓고 4인의 희생자에게 군례를 바쳣다. 그는 방어소에 들어가 그것이 몹시 파괴되고 흩어진 것을 발견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뒤엎어져 있었다.
찢어버린 책과 서류가 땅에 산산히 흩어지고 약탈자들이 잊어버리고 채 못본 다른 물품과 같이 신부가 작은 나무판쪽에 펜으로 쓴 『성로신공』의 「뎃상」이 나무 십자가와 뒤범벅이 되어있었다. 돌연히 대위는 모래속에서 신부의 작은 성체현시대를 발견하였으며 그곳에 아직도 성체가 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대위는 성체현시대를 백포로 싸서 「모티린스키」 요색으로 운반했다.
자기가 성체를 배령할 결심도 내지도 못했고 또 신부가 그에게 만일의 경우가 있더라도 하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백의서교회의 신부들이 있는 곳까지 성체를 운반할 결심도 나질 않아서 그는 부하의 하사관의 동의를 얻어 다음과 같이 하기로 결정했다.
즉 한사람의 사제도 없는 사막의 장엄속에서 깨끗한 흰 장갑을 끼고 대위가 성체현시대를 들고 하사관이 무릎을 꿇고 성체를 꺼내어 영했다.
이 비극의 통지가 뭇사에게 다다랐을 때 그는 심한 괴로움과 분격에 사로잡혔다.
12월 26일 그는 「모티린스키」요색의 드 부릭크 부인에게 편지 한통을 보냈다.
『유일한 천주께 찬미가 있어지이다. 「아제에르」의 사람들 저 이간쟁이들 저 사기꾼들이 죽인 우리들의 은수자 샤르르의 동생이며 우리의 친구인 마리씨에게. 호가아르 아메노칼 데부우르 뭇사 아그 아바스타아느로부터… 우리들의 친구이며 당신의 오빠인 샤르르의 죽음을 알자 마자 나의 눈은 닫혀졌읍니다. 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암흑으로 되었읍니다. 그의 죽음은 나에게 큰 고통을 줍니다. 나는 저 도적이며 사기꾼인 배반자들이 그를 살해한 장소에서 멀리 떨어져있읍니다… 그러나 천주성의에 거스리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복수를 다할 때까지 「은수자」를 살해한 자들을 죽이겠읍니다. 은수자 샤르르는 당신들 만을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은 것이라고. 천주가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그리고 우리가 천국에서 그와함께 있게될 것을』
신부는 이 편지에서 복수정신만을 배척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부의 희생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가장 의미심장한 진실은 뭇사가 즉시로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말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피의 증명 위에 찍힌 「호가아르」의 소인인 것이다.
後記 1
이미 1917년 1월에는 당시 육군대신이었던 이료데이는 라페리이느를 프랑스의 전선에서 소환하여 사하라부대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즉시 라페리이느는 모든 군사행정을 한손에 쥐고 뭇사와 구정을 새롭게 했다. 두 사람은 완전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2년동안 「세느시스」교도에게 대한 게리라를 지휘했다.
라페리느와 뭇사 두 사람은 다 1920년에 죽었다. 「타만라셋트」의 은수자인 그들의 친구가 죽은지 4년의 후였다. 신부의 동생인 마리 드 부릭크는 조금 늦게 1922년에 죽었으며 종자매 마리 드 봉디는 1934년에 세상을 떠났다.
1927년에는 이미 드 후꼬오 신부의 시복을 위해서 조사하는 수족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교황의 재결을 기다려 현재 「로마」에서 검토중에 있다. 신부의 시체가 「엘고레아」의 묘지로 옮겨진 것은 이 성회법의 규정에 의한 수속을 하기 위해서이다. 신부가 유언을 부탁한 것과 같이 그 시체는 오래지 않아 「타만라셋트」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기대되고 있다.
後記 2
오래동안 후꼬오 신부는 한정없는 임무를 수행하는 도움이 될 동지를 찾고자 했으나 생존중에는 한사람도 찾지 못했다.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한 미셀 수사는 「타만라셋트」에 도착조차 못했던 것이다.
만년에 신부는 자기가 세상을 떠날 때 그 사업이 계속되도록 한 사람의 사제가 그와 함께 있기 위하여 「호가아르」에 올 것이라는 생각에 잠겨 있었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모든 희망을 분쇄한 것이라고 생각되었을 때 그와는 반대로 그의 죽음이 마침내 제자들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1933년 『예수의 작은 형제회』가 창설되었다. 최초에는 소수밖에 없었다. 그 회원은 「남오랑」현의 「엘 아비오드 시리 세이크」에 왕성한 수련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후꼬오 신부가 마음에 품고 실행한 「나자렛」의 이상을 따르는 것이다.
그들은 3·4인 혹은 5인 정도의 「클럽」으로서 지내고 있다. 빈민과 유목민 사이에서 그중에서도 가장 빈한한 자로서 같은 집 같은 텐트에 살면서 같은 노동을 하며 생활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형제이 클럽에서도 그들은 동시에 잠심과 예배의 생활을 하고 있다. 선교사도 노동사제도 아니고 그들은 세속에 복종을 하고 옛적의 수도자들이 옛날의 빈곤 속에서 산 것과 같이 그들은 현대의 빈곤 속에 사는 수도자들인 것이다.
『예수의 작은 자매회』가 창립되었다. 이 수녀들의 수련원은 「에코스 앙 프로방스」 근처의 「튜베」에 있다.
1933년 이해 또 하나 즉 드 후꼬오 신부의 이상에 연결된 이성의 수도회 『성심의 작은 자매회』가 존재하고 있다. 그 수녀들은 다른 두개의 수도회 보다 훨씬 관상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수녀원은 「몽뻬리에」 부근의 「마아즈」에 있다. 이들 수도회의 사명은 다른 모든 수도회와 마찬가지로 우선 첫째로 기구와 조배이다.
이들 수도회의 독창성은 오늘의 식민지의 대중과 「프로레타리아」 대중의 생활과 똑같은 노동과 빈곤의 생활 속에서 가난에 대한 사랑과 날마다의 빵을 얻기 위하여 괴로움을 참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써 이 사명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수도회는 선전은 하지 않으나 드 후꼬오 신부가 원하듯이 자기들의 생활을 통하여 애덕과 복음적 진리를 넓힌다고 하는 참된 사도적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