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불리운자는 많으나 간선자는 적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인류의 구세주로서 이세상에 오는 모든 사람중에 한사람도 제외하지 않고 모든 사람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그리하여 칼빈이 주장하는 구렁에 정설을 이단(異端)으로 판정하였다. 그리스도의 사상을 이어받은 교회는 미사 봉헌문에도 전세계의 구원을 위하여 바치는 제물이라고 명언하고 있다.
베드루 종도께서도 『이는 주사람들의 멸망함을 원치 아니시고 오직 모든 사람의 개심하기를 원하심에서이니라』(베드루 후서 3장 9절)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을 생각하여 볼 때 십자가상의 희생에서 한사람이라도 제외하셨다면 그 기억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일까.
그러면 멸망의 원인은 어디 있는 것일까?
성경의 비유에서 결론을 내린다면 불리운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필요한 희생을 하지 못하였다는 결론이 된다. 즉 목적에 알맞는 수단은 쓰지 않았다는 결과가 된다.
반대로 구원되는 사람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을 쓰고 필요한 희생을 하였다는 결론이 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천주의 사랑에 살고 우리 영혼을 구하는 조건은 나날이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라면 천주를 사랑하려면 필연코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천주의 사랑에 반대되는 모든 사욕을 버려야 한다는 법칙이 선다.
세상에서 천주를 사랑하고 그 성의(聖意)를 실행하는데는 자기를 죽이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는 이 희생을 두려워함에서 그 일생을 하나의 공상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적을 사랑하면서 수단을 원치않는 사람은 공상가(空想家)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병을 고치고 싶으나 쓴약은 먹기싫다는 사람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여기에 성 이냐시오가 말하는 불편심(不便心)이 문제가 된다. 어떻게 해서라도 목적에 달하겠다는 위대한 열성은 진실하고 유일한 불편심을 가져온다. 유일한 열정인 경우에 그 불편심은 절대적 것이다. 여러가지 정열에 나누어 졌을 때 그 불편심은 상대적 것이된다. 불편심은 무기력도 아니고 무관심도 아니다. 무기력은 결점이지만 열정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큰 은혜다. 이 열정은 선(善)의 방향에로 가져간다면 큰 성인이 될 수 있다. 성 바오로 성 이냐시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그밖의 다른 성인들은 모두 위대한 열정가들이었다. 불편심이란 획득한 의지의 용덕이다. 이 용덕으로서 자기 애욕과 원욕과 결정을 목적에 따라서 조종하고 만사에 있어서 이 목적을 더 잘 달하는 수단을 선택하도록 하는 미덕(美德)이다. 즉 천주의 가장 큰 영광과 자신의 구령과 완덕(完德)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하는 선덕이다. 만일 목적이 하나뿐이라면 지혜로운 사람은 만사에 있어서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성공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끊고 오로지 유익한 그리고 언제든지 가장 큰 효과를 내는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또한 논리적인 것이다.
세속을 사랑하는 사람도 이와같이 행동한다. 어중간한 수단이란 무익한 것이다. 유일한 목적 외에 다른 어떤 것에 애착하면 힘이 나누어져 전력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
천국은 강포한 자가 차지한다는 성경 말씀은 만사에 있어서 천주의 가장 큰 영광과 자신의 최대의 상급을 위해서 진심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세속에 대한 큰 야심을 가진 사람은 그가 목적만 달하면 되기 때문에 어떠한 희생이나 고통도 거절하지 않고 모든 수단을 죄다 이용한다.
그가 실패하는 경우에는 그가 어떤 제이의적(第二義的) 욕망에 끌려 어떤 필요한 희생을 하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성공했을 때에는 그 원인이 만사에 있어서 오로지 그 목적을 더 잘 달할 수 있는 수단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한 성공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가지 사물(事物)에 마음을 나누는 것은 그 성공을 나누는 결과가 된다.
우리는 짧은 세상살이에서 천주님이 원하시는 모든 공로를 닦아야 한다.
『대저 천주 성신께 격려디는 이는 다 천주의 자녀인 연고니라』(로마서 8장 14절) 하신 말씀에 인하여 우리는 성신의 모든 권고와 지도에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완전히 따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에 말한 불편심이 절대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내안에 좋지못한 사욕 편정이 남아있어 성신의 권고와 지도에 따르기를 방해하고 도리어 듣지 말라는 세속의 말을 듣도록 충동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전심 전력을 다하지 않을 때 완전히 하는 것은 아니다.
陳聖萬 神父(大建神學大學 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