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사와 치명일기들을 상고하여 보면 순교한 연월일과 특히 영세 본명 미상의 순교자들이 많아, 순교 일력(日曆)을 꾸미는데 지장이 많은 것이 유감이다. 다른 박해때에도 그러하지만 순교자가 제일 많았던 1866년(丙寅) 마지막 박해 즉 8도 전역에 파급되었던 교난에, 무려 만여명의 순교자가 있었다 하는데. 1895년에 고(故) 민 대주교께서 조사한 순교자 수는 불과 8백76명 밖에 안된다. 그 조사 문적에도 순교자의 성 본명 혹은 연월일의 미상이 대부분이다. 여기 순교 일력에 실리는 것은 성 본명과 연월일이 대개 적힌 순교자만을 추려실리기로 하고 그 외의 것은 부득이 싣지 못한다. 여기에 참고로 민대주교께서 조사한 1866년의 순교자 명부를 소개하면 서울 새남터, 서소문밖 네거리, 포청(捕廳=獄) 양화진(楊花津), 강화(江華) 등지에서 순교한 분들 중 359명이 밝혀지고, 수원(水原) 39명 장단(長단) 5명 광주(廣州) 8명 양주(楊州) 5명 남양(南陽) 2명 죽산(竹山) 15명 충청도 공주에서 164명 홍주(洪州) 83명 해미(海美) 39명 고마수영 10명 충주(忠州) 15명 청주(淸州) 15명 전라도 전주(全州)에서 13명 여산(여山) 17명 나주(羅州) 3명 진산(珍山) 1명 경상도 대구에서 3명 진주(晋州) 2명 상주(尙州) 19명 통영(統營) 10명 울산(蔚山) 3명 강원도 강릉(江陵)에서 1명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17명 황주(黃州) 3명 풍천(豊川) 1명 곡산(谷山) 2명 수안(遂安) 1명 서흥(瑞興) 1명 평안도 평양 1명 함경도 영흥(永興)에서 18명이다. 그리고 영월은 분명하나 날자 미상의 것은 「초순 · 중순 · 하순」이라고 하여 실리기로 하였다.
◇10月◇
2일(1832년)
▲1801년(辛酉)박해시에 겨우 12세이던 순조왕께서 연세 차차 많아지매 친정(親政)을 하시게 되어 애매하게 천주교도를 학살할 것을 싫어하던중 1832년 여름에 홍수로 많은 국민이 사상하는 것을 천벌이라 인증하고 경상 강원 황해도에 수감되어 잇던 교도 45인을 특사 방면하는 동시에 박해령을 완화하였다. 그래서 교회는 소강(小康)을 누리게 되어 범주교 나신부 정신부 등이 입국하여 순조 생존시에는 무사하였던 것이다. 초순(初旬)(1827년)
▲전라도 곡성(谷城) 옹기굴 사건으로 일어난 박해시에 이요왕(聖三)이 전주에서 순교.
6일(1866년)
▲황해도 백천(白川) 사는 차요안은 본시 조(曹)가인데 가난하여 서울로 와서 차씨의 양자로 들면서 입교영세하였다가 잡혀 옥중에서 순교하다.
초순(初旬) (1831년)
▲경상도 안동(安東)의 양반 학자 김호연(金浩淵)은 일찌기 유볼도학에 능통하여 소백산(小白山) 중에 들어가 은수생활을 하다가 마침 천주교 신자를 만나 여러날 토론 끝에 비로소 진리를 깨닫고 바오로로 영세하여 본가로 돌아와 열심수계하며 전도하였다. 그 부친의 극력 반대와 심지어 무서운 사형(私刑)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용맹히 신앙을 증명하다가 종내 부친의 몹쓸 매에 맞아 순교하다.
12일(1845년)
▲복자 안드레아(金大建)은 십년의 형설(螢雪)과 활약의 결과 신부가 되어 고주교와 안신부(후에 주교됨)를 모시고 일엽편주로 황해를 돌파하여 충청도 강경황산개(江景黃山浦)에 비밀히 상륙하다.
3일(1866년)
▲황해도 신천(信川) 사는 요왕(朴乃浩) 회장이 서울에 피신하였다가 잡혀 양화진(楊花津)에서 순교하다. 중순(中旬) (1866년)
▲경기 광주(廣州) 사는 이아오스딩이 충청도 홍주에 와 살다가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순교하다.
▲한국교구 초대 감목 소주교의 유해가 몽고에서 옮겨 서울 대성당에 안장
20일(1835년)
▲한국교구 초대 감목 발도로메오 브르기엘 소주교가 입국도중 몽고 「뻬리구」에서 별세하다.
21일(1866년)
▲황해도 신천(信川) 사는 방지거(李如政) 그 아내 김마리아 그 아들 바오로(天祚) 세 사람이 경기 시흥(始興)에서 잡혀 양화진에서 순교하다.
22일(1801년)
▲전주 아오스딩(柳恒儉)의 남은 가족 즉 부인 맡며누리 누갈다(부부동정) 둘째 아들 요왕(文喆) 세째(9세) 네째(6세) 다섯째(3세) 아들들과 제수와 그의 아들 유마테오(강주도령) 등이 잡혀 어린 아들 셋은 흑산도 거제도 신지도로 각각 귀양을 가게되고 다른 이는 후일 순교하였음
24일(1801년)
▲주신부 사건과 황사영(黃嗣永) 사건의 연루자요 호남 사학 괴수로 잡혀서 서울까지 심문을 맏으러 갓다가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명으로 아오스딩(柳恒儉)과 그 아우 관검(觀儉)과 방지거(尹持憲)는 전주 남문박에서 육시를 당하고 연루자 도마(金有山)와 이우집(李宇集)은 참수형을 받다. 동일(1846년)
▲복자 안드레아(金大建) 신부의 시체가 서울 새남터에 가장되었다가 경기 안성 미리내(安城 美山里)에 옮겨 안장되다. 동일(1866년)
▲서울 살던 베드루(金漢池)와 최야고버가 양화진에서 순교. 29일(1801년)
▲초대 교회의 혁명 투사요 소년 진사(進士)로 유명하던 알렉상델(黃嗣永)이 정부의 무도한 박해에 반기를 들고 도이를 모아 지하운동을 전개하며 북경 주교에게 한국 교회사정과 순교자들의 사적과 서양군함을 청하여 우리 정부와 통상조약을 맺아 신교자유를 얻게해달라는 탄원서 소위 백서(白書)를 작성하였다. 이 백서는 13,000여자로 된 장문이었었다. 불행히 수일내로 발각 체포되었다. (1839년)
▲우리 79위 복자중 유일한 소년복자 베드루(柳大喆)가 그 부친이 잡힌 후에 자수하여 순교하다. 동일(1831년)
▲충청도 공주에서 원베드루가 순교. 하순(下旬) (1801년)
▲초대 신자로서 유명하던 유스디노 조동섬(趙東暹)의 아들 도마스가 신앙문제로 함경도 무산(茂山)으로 귀향간 아버지를 따라가 효성을 다하던중 양근(陽根) 군수가 그 아버지를 못죽인 분풀이로 도마스로 잡아다가 두달동안 혹형을 가하여 죽였다. 하순(1866년)
▲광주(廣州) 살던 아오스딩은 일찌기 권신부의 복사로 있었다. 그 매부 황안드레아와 함께 서울에서 잡혀 양화진에서 순교하다.
志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