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短編小說(단편소설)] 僞悪者(위악자) (上)
발행일1962-10-28 [제348호, 4면]
무서리에 풀 죽은 낙엽들이 바람 따라 이리저리 구른다.
두 손을 아래 호주머니에 찌른채 낙엽을 굽어보며 걷는 현수 머리 속에는 아침에 아내가 톡 쏜 한 마디가 도사리고 자리를 뜨지 않는다.
『위선자!』
(-결국은 사람 저마다가 낙엽 같은 존재 아니던가? 손에 얼음 박힌 길손에게 모닥불 좀 권했다기로…)
저녁 바람이 휙 불자 플라타나스 잎들이 우수수 진다. 떨어지는 잎을 얼굴에 맞으며 무턱대고 걸어본다.
지향 없이 걷는다는 것.
이승 삶에도 매한가지-덧없이 시침(時針)에 쫓기어 뛰어가다 기어가다 벼랑 기슭을 오가는 딱한 이웃들이 무수함을 느끼자 검은 구름이 가슴에 엄습해 온다.
(위선자! 위선자! 내가 정말 위선자였던가? 빙도(氷度)를 내리짚은 사람들의 마음마음- 날씨가 좀더 따스해지고 밝아져야겠는데 …)
아무리 자기 처사를 합리화 시켜보려고 애써도 아내 말이 옳을 성 싶었다.
- 제발도 못씻는 주제에 남의 발을 씻어주려 든다는 것은 주객(主客) 엇바뀜이요 가장된 선(假裝善)인지도 모른다. 자기 가족은 단간 셋방살이에 궁한 티를 면치 못하게 버려둔채 남의 예사로운 딱한 사정 덜어주기에는 어느 누구 못지 않게 호기로이 돈을 돈지는 행위는 고스란히 『마이너스 처세』가 아닐 수 없었다. 부수입 없는 박봉살이의 그가 밖에서 호기를 부리는 그만큼 집살림은 쪼들리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건 수신제가(修身齊家)가 아니잖은가?)
하루에 적어도 세번 이상 성호 그어 합공하는 타성적인 생활도 위선이 아니기를…
『가면!』 『위선!』 『가면!』 『위선!』 주마등 마냥 꼬리를 물고 저만치 앞에서 맴도는 역된 환상을 뿌리치듯 고개를 비켜들며 주먹을 뽑아 허공을 내리 친 현수는 버럭 소리 지른다.
『아무러면 어때! 나는 떳떳해! 했어. 마음 내키는 일을 못할에엔 살아서 무엇해!』
실성한 사람모양 혼잣말을 뇌까리는 그를 지나가는 이들이 힐끗 흘겨본다. 소녀들 몇이는 킥킥 웃으며 간다.
남이야 흘기건 비웃건 알배 없는 현수는 제물에 흥분해 돌뿌리를 차며 마구 걸었다.
뭉클! 발끝에 채이는 것이 있다. 헐벗은 가로수 아래 냉냉한 아스팔드 위에 나동그라저 있는 한 무더기 살덩어리.
(송장?)
섬찟 등어리에 스치는 번개 같은 것을 의식하며 몇걸음 물러섰다. 어스름 속에 눈을 켜 더듬으니 송장은 아니었다. 분명 꿈틀거리는 것이 하나가 하니고 둘- 사람이 근접하였음을 눈치챈 고사리 손이 옆으로 뻗더니 가랑잎만한 손바닥이 짝 펴진다.
서너살 먹은 아기를 업은 소녀가 길가에 쓰려저 실신해 있었다. 실신이 아니라도 기진맥진해 보이자는 것이엇다. 그러다가 사람 발자국 소리가 다가오면 업힌 동생을 살금 꼬집는다. 어린 것은 눈을 떠 살피다가는 가랑잎 손바닥을 내보이는 것이다. 남의 동경심에 호소하는 지능적 구걸방법이다. 연극 치고는 너무도 처절한 동심의 항거라 느꼈다.
현수는 과거에도 몇차례 속았다. 속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어린 연기자들이 밉지 않았다.
(오죽하면야…)
이제 바람 차고 어둠이 첩첩 깔린 한길가, 새들마저 모금자리를 찾아 다 돌아간 이 시각, 어린 몸이 돌바닥에 엎드려 실신을 가장해야만 사는 아픈 현실에 직면하자,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며 아내가 꼬집는 소위 위선자가 속에서 뱀 대가리처럼 짖궃게 꼬개를 치켜드니 견디어 낼 힘이 없었다. 부리나케 안팎 주머니를 뒤졌다.
백원 한장과 십원짜리 석장- 남이 볼까 두리는 듯이 재빨리 고사리 손에 얹어 주고는 급히 걸음을 재촉하였다. 걸으면서 생각은 저절로 소녀 형제의 집안으로 달려갔다.
(저 애들은 부모가 없을까? 있다면 왜 추위 속에 어린것들을 저토록 모진 세파에 시달리게 내버려 두는 것일까? 저 애들도 남 못잖게 잘 살 권리가 있다. 똑같이 박혀진 천주의 모상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혹시 고아라면? 가여운 싹들…)
바싹 마른 나무잎들이 바람결에 희롱되어 굴러다니는 것이 소녀 형제를 연상시켜 준다. (우리 주변에는 남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수없이 산재해 있다. 불행한 이웃들에게 골고루 따스한 손길을 내밀어 주지 못하는 처지가 안타깝구나)
머리를 드니 초롱초롱한 별들이 눈동자에 와서 꽂힌다.
(-허지만 내가 무슨 잘났다구 남에게 손을 내민담. 여력도 없는 약자가… 아내의 말대로 주제 넘는 겉꾸밈! 허위가 아니냐?)
상상을 비약시키며 걷는 사이에 뻐스 정류장까지 왔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속에 대여섯명이 지친 표정으로 뻐스 오기를 기다리고 서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무리 뒤져도 없다. 그제서야 현수는 오원 한장 남기지 않고 몽땅 줘버린 것이 뉘우쳐졌다. 그렇다고 되돌아가서 역구걸은 못할 일- 냉기 쌀쌀한 밤길을 삼십분간 걸어서 집에 왔다.
아내는 남편이 밖에 나가서는 남에 대하여 묽은 점이 못마땅하였다. 산 사람 눈앞에서 속여먹는 영악한 세상에 쪼들리는 살림은 밀어놓고 호주머니에 돈만 있으면 남 위하여 털어내고 마는 갑부댁 외동아들의 습성 닮은 철부지 처사가 생각수록 분옹이 터지곤 하였기에 극성스럽게 바가지를 긁는지도 모른다.
현수 성미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방이고 식당이고 술집에고 가면 으례껏 대금 지불은 자기의 의무로 자처했고 주머니에 돈이 있고보면 딱한 사람을 만나 그대로 지나쳐버리는 것은 죄스러워 못배기는 만성 소심증환자인 상도 싶었다.
밤이 이속해서 집에 들어서는 그를 대문께까지 뛰쳐나와 반겨맞은 것은 강아지와 아장아장 걸음의 세살배기 딸 숙이었다.
순간 현수 이멩 띵 오는게 있다. 아침에 출근할 때 숙이가 억지로 자기에게 약속시키던 말이 머언 메아리되어 대문간에서 되살아왔다.
『아빠 오늘은 인형하구 빵 사줘야지 돼 응?』
아빠 손이 빈털털이임을 본 숙이 금세 시무룩해지더니 글썽한 눈으로 조로로 엄마 한테로 달아나며 잘근잘근 입술을 깨문다.
(숙아 용서해라. 내일은 꼭…)
뚜벅뚜벅 다가가서 딸의 머리를 쓸어주며 그 어떤 죄의식(罪意識) 비슷한 자책(自責)에 가슴이 누질리었다.
(나 하나를 기둥같이 믿고 사는 목숨들- 이 딸과 아내를 불행하게 해서는 안될텐데…)
퍼뜩 현수 시야(視野)를 길바닥의 광경이 스쳐갔다. 숙이에게 인형과 빵을 사준다던 돈을 깜박 잊고 형제에게 주고만 것이 가볍게 후회되었으나 등에 업혔던 숙이 또래의 어린 것과 제 딸 숙이를 엇바꾸어 생각해보자 몸서리 쳐지며 고개를 살래 저었다.
『우리는 셋방살이나마 세끼 밥 제대로 먹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어.』
누구에게 주는 말도 아닌 독백을 나직히 얼버무리며 무거운 생각들을 떨어버리려는 듯이 번질하게 밥숟갈을 움직였다.
직장에서 월급을 탔다. 이것 저것 제하고 나니 얄팍한 월급봉투를 받아 안주머니에 꾸겨넣고 거리에 나섰다.
「네온 싸인」이 또 하나의 대도시를 꾸며주는 인간 수림(樹林) 속을 누비고 몇 골목을 꺾어져 현수 혼자 가을을 걸어간다.
사양족(斜陽族)이 아니어도 월급날 저녁은 흐뭇한 스스로의 체온에 젖어 무턱대고 거리를 싸도는 것은 월급인의 값싼 서정인지 모른다.
지폐라는 몇장의 주문(呪文)박힌 종이쪽지 때문에 살고 죽고 울고 웃고하는 어린광대가 우습고 어이없어 허허로운 냉소를 한바탕 가을 석양에 내던지며 단골 선술집에 들어선다.
술은 『친구 따라 강남』격으로 마신다지만 현수에게는 혼자 고즈넉히 몇잔들 마시고는 조용조용 빠져나와 홍조(紅潮) 띤 뺌을 어루만지며 별빛을 더듬어 귀로(歸路)에 오르는 것이 월급 날의 습성이었다.
술이 거나하게 돌가가면 저마다 의인이요 영웅 아닌 사람이 없다. 호기탕탕하게 떠벌리며 술의 위력을 과시하는 무리를 저만치 물러나와 「위선자」 문제를 곰곰 생각하며 의식 없이 발을 옮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