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독자의 가톨릭시보지의 외상값이 발표되었을 때 독자로서의 부끄러움과 또 출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오죽해서야 이러한 것을 발표했으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 시보의 반사경(反射鏡)을 통하여 이 나라의 가톨릭의 수는 경이적(驚異的) 증가를 과시하고 있는 반면 가톨릭출판물은 3년전의 출판실적과 비겨 2·3분지1로 위축되었다고 보도하였다. 우리들은 이 문제를 소홀히 넘겨버려서는 안되며 이 문제를 좀 더 심중히 다루어 그 원인을 분석평가함으로써 타개책(打開策)을 강구해야만 할 것이 아닌가 한다.
위선 출판물이란 독자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또 출판물이 없는 곳에 독자가 있을 수 없음은 서로 깊은 유기적(有機的)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 출판물과 독자의 관계는 마치 음식점의 음식물과 고객(顧客)의 관계와 같다고 생각된다. 아무리 훌륭한 요리사가 최고급의 음식물을 만들어 놓아도 손님이 먹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헛일이며 또 아무리 손님이 배가 고프고 식용이 왕성하다 할지라도 엉터리 요리사가 만든 맛없는 음식물은 한번은 속아서 먹는다 할지라도 그다음부터는 다른 음식점으로 옮겨버린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 여기서 가톨릭 출판물의 위축된 원인과 그 책임의 소재를 밝힌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일뿐 아니라 크게 뜻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하여 소견을 적어보고자 한다.
출판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첫째 표준 가톨릭용어사전을 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선교사의 도움도 없이 서적만으로 신앙을 가져왔다는 전교사상(傳敎史上)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남겨주었것만 그 후손들은 백년이 훨씬 지난 금일에 와서도 한 성인의 이름을 <모이세> <모이서> <모세>라고 동인이명(同人異名)을 아직도 부끄러움도 없이 떳떳하게 쓰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 아닌가 한다. 용어의 통일이 출판사업과 문화사업에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기서 누누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둘째 독자를 위한 출판물이 되라는 것이다.
독자를 위하지 않는 출판물이 어디있나 하고 반문할지 모르나, 독자들이 읽지 않으면 못배기는 출판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앞의 비유를 빌린다면 아무리 훌륭한 요리사가 영양가(營養價) 백 「퍼센트」의 음식물을 만들었다 할지라도 손님들이 먹고싶어하는 자극을 주지 못하고 또 먹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렇다고 음식물의 영양가도 모르는 손님의 무식을 나무란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출판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출판사업이 잘되느냐 못되느냐의 주도권은 독자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새로운 「아이디아」를 찾는데 노력을 아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가톨릭출판물로서의 원래의 임무와 사명, 즉 주체성(主體性)을 가지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옛날에 양약(良藥)은 입에 쓰다고 하였으나 금일에 와서는 양약은 입에 반드시 쓰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셋째 집필자(執筆者)를 많이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출판물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항상 독자들에게 싱싱한 영양분을 공급해주기 위해서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하겠다. 그러나 집필자는 일조일석에 완성품으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웃나라 일본은 신자수로 보면 우리나라의 절반정도밖에 안되지만 교회의 출판사업이 성행(盛行)하고 있는 이유의 한가지는 이와시다 신부님이 앞날의 출판물을 통한 전교(傳敎)를 위하여 집필자를 양성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 열매를 오늘에 와서 거두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독일어에 능통한 한 교우가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요 철학자인 칼 아담 신부의 책을 번역해서 출판사에 가지고 갔더니 출판관계를 담당하는 신부는 외국어에 능통하다 할지라도 신학을 공부하지 안한 사람의 번역은 일독의 가치도 없다고 돌려 보냈다는 이야기를 한 신부님으로부터 들었을 때 지당한 말씀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앞날의 가톨릭 출판사업의 발전은 어떻게 될 것인지 두려워졌다.
다음에 교우인 독자들은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첫째 가톨릭 출판물의 흥망(興亡)의 열쇠는 교우인 우리들 독자가 가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은 모름지기 우선 한 종류라도 좋으니 가톨릭 출판물의 정기구독자가 되자는 것이다. 이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포 두잔이면, 한달 「빠아」에서 맥주 한병만 적게 마시면 일년간의 가톨릭시보의 대금이 되니 이 얼마나 편하고 쉬운 문제랴. 다만 남은 것은 실천에 옮기는 것 뿐이다.
둘째 가톨릭 출판물의 선전에 관심을 가지자는 것이다.
출판물이 육성(育成)의 열쇠를 우리들 교우인 독자들이 가지고 있다면 그것의 선전과 독자 획득에 무관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기차여행을 할 때면 꼭 「가톨릭 다이제스트」와 시보를 차간에 가지고 간다. 그러면 엎에 사람이 반드시 보여달라고 하기 때문이다 단조로운 기차여행을 이용하자는 속심에서 시작했으나 성적이 퍽 좋았다. 좀더 적극적인 방법은 읽고난 간행물을 읽을만한 사람에게 그냥 심심풀이로 읽어보렴 하고 주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기타 여러가지 방법이 또 많이 있지만 아직 우리들의 관심이 적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상 몇가지 생각나는대로 서툰 솜씨로 적어 보았지만 이것이 계기(契機)가 되어 출판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교우 독자들이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의 길을 모색하는데 참고가 된다면 필자로서 무한한 기쁨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10·13 於大田)
이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