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3) 禁斷(금단)의 世界(세계) ①
발행일1963-05-26 [제376호, 4면]
그 후 한동안은 내 마음이 잔잔했다.
거츠런 말이 귀에 들리고 따가운 눈초리가 내 얼굴을 스치기로, 뒤에 있는 위대한 어머니의 애정을 생각했다.
그 애정을 나는 마음의 기둥으로 삼을 수 있었다.
성미가 꽁한 순자는 뺌맞은 분함을 풀지 못하고, 노상 흰자위 눈으로 나를 흘겨보았지만, 문제시 안했다.
강숙이는 순자와 가장 친한 사이었으나 그렇다고 순자의 감정에 합세하여 나를 적대시 하지는 않았다. 섭섭하면서도 매물묵같이 물은데가 있는 그는 항상 구김살 없는 미소를 보냈고, 순자의 눈치가 닿지 않는 곳에서는 한결 다정하기도 했다.
『뺌맞은 일만 생각지 말고, 말 한마디로 남의 가슴을 송곳으로 찌른 일도 좀 생각하라고 해라…』
순자의 귀에 들어갈 것을 예상하고 강순에게 이렇게 말했는데, 그 이튿날 보아도 순자의 뾰죽한 감정은 누구러진 흔적조차 안 보였다.
하루는 영어 수업 시간인데, 간밤에 새로 두 시까지 얽든 불란서의 소녀작가의 작품을 리-다 뒤에 숨기고 읽고 있었다. 나는 독서에 재미가 들면 열중하는 편이라, 한동안 교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집중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웃으운 대목에서 혼자 빙긋이 웃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쳐들고 보니, 교실 안은 조용해지고 모든 두 눈동자들이 뒷줄에 앉은 나를 돌아보고 있었고, 선생님은 내 앞으로 걸어오는 중이다.
나는 리-다 뒤에 반쯤 빚어나온 소설책을 치울까 하다가 그대로 두었다. 조금 전에 순자가 일어나서 뭐라고 선생에게 고해바치는 소리가 비로소 어렴풋이 기억에 떠오른다.
나는 왼편으로 다음 다음 줄 뒷편에 앉은 순자를 힐끗 보았다.
조그마한 입술을 지끈 악물고,
(어떻니?)
하는 눈초리가 거기 있다.
『무어냐, 읽는게?』
선생의 매디 굵은손이 내 책상 위에서 움직였다. 키는 잘막했으나 손매는 유달리 굵고 크다.
『공부시간에 공부 않고 이런거 읽으면 되냐?』
『………』
나는 비뚫어진 영어교과서 위에 시선을 주고 가만히 있었다. 탁 하고 소설책이 교과서 옆에 떨어진다.
『일어나서 읽어보아라!』
『소설책이요?』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선생을 바라보았다. 영어 선생님답지 않게 코도 납작하고 얼굴도 눌러논 네모 송편같이 밋밋했다.
『오늘 배운 영어과목을 읽어보란 말이다…』
선생님은 감기가 들었는지 큰 소리를 내니까 목소리가 걸었다.
여기 저기서 킥킥 짓눌린 웃음 소리가 터졌다.
감기든 영어선생님의 목소리 때문이 아니고 내가
『소설책이요?』
한 바람에 모두 웃은 것이었다.
나는 일어나서 오늘 새로 배운 괌고을 거침없이 읽었다.
선생님은 조금 의외인듯한 표정이다.
그럴듯이 나는 교실에서 아는 척한 일이 한 번도 없었고, 일어나서 읽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설은 집에서 보는거구, 공부 시간에 보는 것은 못 쓴다. 알았지?』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했다.
네모도리 얼굴은 다시 영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따금 그 시선이 나에게로 왔다. 나는 그 사이에 소설책을 치우고 교과서를 두 손으로 받쳐세워 보고있었으나, 생각은 소설의 결말이 궁금하여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이 나와 비슷한데가 있었다. 호기심이 가는대로 모험을 해보는 점과 미지의 세계를 대담하게 찾아들어 가는 용기와 결단성이….
나는 농구부원이기 때문에 그 날 방과후 농구연습을 하다가 늦게야 교문을 나섰다. 같은 농구부원인 강숙과 함께 교문에서 몇발자욱 안가서 옆으로 난 골목 어구에서 나에게 아는 척하는 대학생이 있었다.
안면은 있는데 얼핏 생각이 안나서 누군가하고 잠시 망서리었다. 이윽고 나는 그가 우이동에서 사진을 찍어준 미스터 단정임을 알았다. 내가 얼핏 못알아 본 까닭으로는 전에는 안경을 안썼는데 지금은 근시안경을 쓰고있었다. 안경을 쓴 그는 한층 단정하게 보였다.
『우연히 이금방까지 왔다가 미스양이 오길래 그냥 지나가기도 뭐하고 해서…』
미스터 단정 얼굴을 붉히며 웃는다.
우리는 셋이서 우이동서 놀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세종로 네거리까지 같이 걸었다. 강숙은 통인동쪽으로 빠지고 미스터 단정과 둘이서 종로를 향해 걷게되었다.
『내일 일요일인데 예정이 있으세요?』
미스터 단정은 한참 머뭇거리더니 입을 연다. 바라보니 그의 얼굴은 또 불그럼하게 상기가 된다.
『아무 예정 없어요』
부끄럼을 타는 남성을 보니 나는 놀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말 우연히 만난거야요? 우정 나를 만날라고 오신거야요?』
『우…우연입니다』
대학생의 대답은 떠듬거린다. 얼굴색은 더욱 빨개진다.
『내일 낮에 영화구경 같이 안 가겠어요?』
『우연히 만나서 영화구경 가자는 것은 흥미가 적은데요!』
『사…사실은 미스양을 만날라고 한시간 이상 서 있었어요』
『내가 농구 연습하고 있는거 아셨나요?』
『네에.』
미스터 단정은 안경 속의 눈을 껌벅거린다. 친구들과 있을 때는 그렇지도 않았는데 단 둘이가 되니 수집음을 많이 타는 청년이었다.
열한시에 A극장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우리는 종로에서 헤어졌다.
이튿날 나는 원피스로 가라입고 열시쯤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문깐에 나와 물주개(如_)로 물을 뿌리고 있었다. 그는 집안에서는 극히 이기주의였으나 이웃간에는 또한 친절심을 베풀기를 잘했다. 그 하나의 예로서 그는 지금 옆집 문전까지 나서서 우리 문전과 똑같이 물을 뿌려주고 있었다.
『어디 가니?』
『친구가 영화구경 시켜준다고 했어요.』
『무슨 영화?』
『학생도 볼 수 있는 영화야요.』
『…영화 보는데 두 시간 잡고 오고 가는 시간 한 시간 잡고 세 시간 안에 돌아오너라…』
『…네에』
나는 아버지의 말꼬리가 맺기 바쁘게 그 앞을 떠났다.
종로에서 서점에 들어가서 잡지책을 한 삼십분간 개평으로 보다가 열한시가 되여 A극장 앞에 도착하니 미스터 단정이 와있다.
A극장 옆은 맞붙어서 S극장인데 그기는 중고교생 입장 사절이라고 써 있었다. 나는 그걸 보자 학생입장 환ㅇ녕이라고 써있는 A극장보다 S극장에 들어가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이봐요!』
A극장의 표파는 데로 가는 미스터단정을 불렀다.
『S극장에 들어가요.』
『중고교생은 입장 사절인데요.』
『그러니까. 거길 구경하자는 거애요.』
『A극장 보십시다. 독일 영화인데 교육적인 면이 크다는군요.』
『교육은 학교서 실컷 받는데 영화관에서까지 받을거 뭐애요.』
미스터 단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S극장 표를 샀다.
나는 학생이 보아서는 안될 세계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고 눈여겨 보았다. 부부간에 서로 미워하고, 아내가 딴 남자와 사랑하는 줄거리었다.
(그따위 것이 그렇게도 비밀인가?)
나는 영화관을 나오면서 스스로 물었다. 부부간에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 영화 뿐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우리 집안도 그러했다.
아버지는 남한테는 친절하지만 어머니한테는 매우 냉정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기색은 더욱 없었다.
(미워하는 사람끼리 왜 한 집 안에서 살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왜 가만이 계시요?』
미스터 단정이 말을한다.
『세계명작소설에는 저따위 얘기가 얼마든지 있는데, 명작은 읽으라고 하고, 영화는 보지 말래니, 무슨 까닭이죠?』
『…글쎄요. …아마, 영화는 자극이 심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때 나는 미스터 단정이 비교적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이 뭐세요?』
그가 사진을 부쳐줄 때 피봉에 이름이 있었으나 잊어버렸었다.
『김진호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