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籍(국적) 없는 小女(소녀) (4) 禁斷(금단)의 世界(세계) ②
발행일1963-06-02 [제377호, 4면]
김진호, 그 이름 석자는 그 후 나의 머리 속, 어느 모퉁이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국민학교 「크라스매트」 가운데에도 마음에 드는 얼굴이 몇 있었지만 그들을 조그마한 자갈돌이라고 하면 김진호는 풍덩 소리를 내면서 수면에 커다랗게 파문을 일으킨 돌이었다.
차분한 성격이 덜렁대는 나와는 대조적이며, 그것이 어쩐지 내 마음 한 모퉁이를 채워준다.
그와 나는 그 후도 서너번 만났다.
한 번은 학교로 편지가 와서 종로의 인류양과자점에서 마주앉아 한시간쯤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두 번째는 교문 근방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다가, 명동의 어느 음악 감상실로 갔다. 그간 그의 입에서 나온 화제는 문학과 음악에 관한 이야기길래 문과 게통인가 했더니, 의외로 의과(醫科)였다.
세번째는 여름방학 직후인 칠월 하순, 그의 우이동의 「트리오」의 한 사람인 미스터 여드름도 「멤버」에 끼어, 셋이서 비봉(碑峯)에 등산을 갔다. 그 때 우리는 산상봉을 바라보는 중턱에서 잠시 쉬었다. 숲 속을 감돌아 흐르는 가는 냇물가에서 땀 배인 얼굴들을 씻었는데, 문득 김진호를 보니 윗도리를 벗은 그의 런닝샤쓰 목에 염주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목에 단 게 뭐지요?』
『묵주』
『묵주가 뭐야요?』
『가톨릭에서 기구할 때 사용하는 염주지요』
『기구가 뭐하는 거야요?』
『"기"는 기도한다 빈다는 뜻. "구"는 구한다는 뜻. 즉 자기가 구하는 것을 천주께 비는 거지요』
『인제보니 신자시군요?』
나는 그의 목에서 묵주라고 하는 염주를 잡아 끌어 가까이 들여다 보았다. 구슬은 절의 염주보다 작고 까만 색갈이며 쇠로된 조그마한 십자가가 그 사이에 달려있다. 그리스도의 목박힌 상(像)이 그 속에 부각되어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지라 신기한 생각도 들고 궁상맞게도 보였다.
『과학(科學)을 공부하면서 그런건 왜 달고 다니세요?』
산을 올라가면서 물었다.
『이건 과학보다 강하니까….』
김진호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더운데 답답하지 않아요?』
『습관이 되어 살(肉)의 일부분 같이 느끼지요. 이걸 안 달고 나서면 허전해요. 마치 자기 혼을 잃어버리고 나온거나 같아서…』
나는 김진호가 신앙에 매우 골돌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이찰나, 나는 그의 몸에서 어쩐지 「나프탈린」 냄새같은 것을 느꼈다. 미스터 여드름이 앞서 오르고 중간이나 김진호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민 뒤에 따르고 있었다. 이때 미스터 여드름이 힐끗 돌아보며 빈정거렸다.
『미스양, 조심해. 미스터김은 보는 사람마다 천주님 앞에 끌어들일라구 애를 쓰니까.』
『정말 그래요?』
나는 미스터김을 돌아보았다.
『…한 사람이라도 마음의 구원을 받는게 좋으니깐요…』
김진호는 정색하며 대답한다.
『…미스양도 천주님 품으로 와야해요.』
그의 말투는 제법 명령적이었다. 나는 그 명령조에 반발을 느꼈다.
『싫어요 나는.』
『왜?』
『묵주라는거 보니, 「나프탈린」 냄새가 나요.』
앞에 가던 미스터 여드름이 발을 멈추고 깔깔 웃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진호는 나를 힐책하는듯한 엄한 표정이 된다.
『그렇게 느꼈다는 거 뿐이야요.』
이렇게 말하며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도 바삐 나를 따르는 기색이다.
『왜 신성한 신앙을 「나프탈린」과 비교하나요?』
내 귓전에 그의 추궁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몰라요 나도…』
「옥타-브」를 높여 나는 명랑하게 웃고는 다시 스피트를 놓았다.
내가 따르는 기색을 보고 미스터 여드름의 오르는 속도도 빨라졌다.
『저까짓 미스터 여드름쯤!』
속으로 생각하며 나의 늘신한 「콤파스」에 채찍을 주었다. 미스터 여드름은 힐끗힐끗 햇빛에 여드름 많은 얼굴을 나에게 돌리면서 신바람이 나서 기어 오른다.
「네 까짓것 쯤…」
나도 숨가쁘도록 그를 추격했다. 한참 이렇게 올라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김진호는 약 오십미터 거리에 떨어져서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기다릴까 하다가 「나프탈린」 얘기가 귀찮아서 미스터 여드름과 다시 경쟁을 시작했다.
돌로 쌓은 산문터가 있는 곳을 지나니 산상봉은 곧 우리 앞에 있었다.
생각한 것 보다는 산상봉은 좁고, 풍설에서 달린 조그만 비석이 외롭게 서 있었다.
비명(碑銘)을 살피니 한자로 신라 진흥왕의 수렵 기념비라 새겨진 글자가 희미하게 읽혔다.
산상봉의 맞바람은 내 머리칼과 원피스를 하염없이 희롱하고 저편 남쪽 얕은봉 넘어로는 한강이 한줄기 구불렁거리는 곡선을 이루고, 서울 시가도 한폭의 그림같이 조그맣게 내려다 보였다.
높은 산에 오르기는 처음인지라 나는 사방의 전망에 매우 감탄했다. 산상봉에서 점심 보따리를 끌렀는데 김진호는 별로 말이 없었다. 가끔 그는 내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진호에게 등을 보이고 북쪽으로 물결쳐 나간 산 줄기를 내려다 보고 있을 때.
『이 산 꼭대기에서는 「나프탈린」 냄새가 안나요?』
하고 그가 와서 말한다.
『…여기는 정반대, 신선한 공기와 웅대한 전망이 있어요』
『이것도 신의 위대한 창조의 일부분이죠.』
『…신은 어디 계셔요?… 저 구름 속에?』
나이론 솜같은 엷은 흰 구름장이 빠른 속도로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을 나는 가르쳤다.
『…구름 속에도 계시고 이 산상봉 들꽃에도 계시고… 어디나 계시죠.』
『나는 안 보이는데요.』
웃으며 대답했다.
『어째 피조물(被造物)은 보면서 그 창조자를 모를까?』
『………』
『…나에게는 보여요』
진호는 이렇게 말하며 사방의 전망에 눈을 준다.
『안경을 썼으니까, 아마 잘 보이는가 보다. 핫핫핫…』
미스터 여드름이 옆에서 야유쪼로 말했다.
『진호야 안경 좀 빌려라 신의 얼굴을 구경하자!』
김진호는 미스터 여드름을 상대하지 않았다.
『…신은 마음으로 감득(感得)하는 거야…』
그는 혼잣말 비슷이 먼 곳을 바라보며 나직히 말한다.
산을 내릴적에 김진호와 나 사이에는 어쩐지 좀 어색해졌다.
울타리 하나가 우리 사이에 가로지른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그의 신앙을 딸아갈 수 없었고 그는 따르지 못하는 나를 안타까히 생각하는 모양이다.
산을 내릴적에 진호는 또다시 「나프탈린」 얘기는 꺼내지 않았으나 그의 입은 대체로 굳은 침묵에 잠겨있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미스터 여드름을 말벗으로 삼았다. 미스터 여드름은 내가 그에게 다가든 것으로 착각을 한 모양이다.
『미스양 뭘 제일 좋아 하셔? 내가 한턱 내지?』
『뭣 때문에 한턱 내세요?』
『우리는 신을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 의견이 같으니까 후렌드가 될 수 있거든. 뭘 좋아하셔? 냉면, 돈까스?』
『내가 좋아하는 건… 「나프탈린」…』
앞에 가는 김진호의 귀에 들리도록 나는 크게 대답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야 한턱 낼태니까 바른대로 좋아하는 걸 말해봐요. 먹는거 아니라도 좋으니까!』
미스터 여드름은 진호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음성을 낮추었다.
『아무것도 특별히 좋아하는거 없어요』
진호에게 들리도록 또 일부러 크게 소리쳤다.
진호의 뒷모습은 우리의 이야기에 신경을 세우고 있는듯이 보였다.
『영화구경 안 가실래요?』
미스터 여드름 끈덕지게 속삭인다.
『학생이 영화 구경다니면 돼요?』
내 목소리는 또 컷다. 미스터 여드름은 두툼한 입술로 소리 안나게 입맛을 다신다. 그 모양이 좀 안됐기에
『내가 좋아하는거 말할까요?…』
나는 음성을 좀 낮추웠다.
『노래 하나 불르세요.』
미스터 여드름은 그 얼굴과는 반대로 비교적 노래성대는 고왔다. 기침을 한 번 도사리고 그는 「케셀라」를 불렀다. 내 마음은 노래보다는 묵묵히 걷고 있는 김진호 쪽으로 쏠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