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2次(제2차) 바티깐 公議會(공의회) 重鎭(중진)
聖德은 年輪같아
歷史의 물구비에 서서
70代에 激務보는 분들
발행일1963-06-09 [제378호, 1면]
▲안벨또.치꼬냐니 추기경
치꼬냐니 추기경은 그의 지위가 교황의 오른 팔인 것이다. 교황에 직접 관여된 일을 취급하는 바티깐 국무장관(國務長官)의 가장 중요한 첫자리 비서직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국무성(國務省)은 국무성성(聖省)이라고 하지 않는다.
요안 23세에 있어서와 같이 그의 후임자에 있어서도 제2차 바티깐 공의회만큼 소중한 일은 없다. 그처럼 국무장관에 있어서도 이에 더한 일은 없게 마련이다. 치꼬냐니 추기경은 성청 내의 미국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당년 80세이며 주미(駐美) 성청사절로서 25년간 「워싱톤」에서 지냈다. 그는 미국의 가톨릭을 깊이 이해하고 있으며 손수 그와 관련된 많은 저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요안 23세께서도 책임 있는 영어번역은 그에게 맡겨왔었다고 한다.
▲오그스틴.베아 추기경
제2차 바티깐 공의회에 있어서 갈려진 그리스도교의 재일치(再一致)보다 큰 일은 없다. 82세의 베아추기경이 지금껏 쌓아올린 재일치 활동만 해도 역사에 길이 빛날만한 것이었다. 베아 추기경은 요안 23세에 의해 설치된 그리스도교 재일치국의 책임자이다. 이것은 바티깐 공의회에 직접 중요역할을 하게되는 동시에 실로 세기적인 과업을 수행하고 있음과 같다.
베아 추기경을 통해 비로소 비(非)가톨릭과 공식적으로 접촉하고 협동하는 길을 장만했으며 가톨릭교회와 갈려간 그리스도교도간의 상통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이 강구되었다.
그의 이 방면의 활동에는 섭리(攝理)의 작용이 있음을 항상 그 성과로서 보여주고 있다. 그는 평생을 성서연구에 바쳐온 분이다. 성청성서학회장을 역임해 오던 중 고고학(考古學) 및 성서해석에 필요한 문제와 연구에 종사해왔다. 「프로테스탄」 등은 성경을 가지고 계시(啓示)의 유일한 원천(源泉)이라고 한다. 베아추기경은 그들의 그런 견해를 바탕으로 재일치 문제를 논의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베아추기경은 가톨릭에 대한 오해를 일소하고 보다 나은 방도 및 무한히 가능한 재일치의 길을 제시하여 항상 「프로테스탄」측의 관심과 존경을 집중시켜왔다.
▲알프레도.오따비아니 추기경
만일 베아추기경을 진보적인데 속한다고 한다면 오따비아니 추기경은 많은 점에 있어서 그와 맞서는 보수적인 또 하나의 큰 산맥(山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가톨릭 교의와 신앙을 수호(守護)하는 검사성성(檢邪聖省) 장관이다. 그의 직책 및 동성성의 직능같은 것이 그를 더욱 보수적인 자리로 몰아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한편 이런 한계를 넘어서 공산주의에 대해 가장 강력한 견제의 위치를 고수해왔다.
죠반니 그론치 대통령이 언젠가 「모스코바」를 방문했을 때 가장 많은 비난 발언을 한 분이었다. 오따비아니 추기경은 공의회 신학문제 준비위원장이었다. 오따비아니 추기경은 공의회 신학문제 준비위원장이었다. 만일 교리에 관한 선포를 한다면 그의 역할은 가장 중요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중책을 이번 공의회에서 처음으로 맡은 것은 아니다. 1950년 성모승천 교리의 준비과정에 있어서도 중책을 맡았다. 그처럼 「바티깐」에 오래 거주한 추기경은 없다. 「바티깐」 울타리 근방에서 탄생하여 거의 70평생을 몇 「마일」밖에 멀리 떠난 적이에 없다. 그의 집안은 지금도 「바티깐」 근방에서 빵공장을 경영하고 있다.
▲유젠 띠세랑 추기경
추기경단장인 그의 연세도 80을 넘었다. 지난번 공의회 첫 회기에서는 제 예식의 중심을 잡아왔었다. 동방교회성성 비서로 우선 그의 수염 모습은 어떤 세기적인 인상을 주고 있으며 또한 곧곧한 자세는 1차대전 당시의 어느 불군(佛軍) 장성을 연상케 해준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만큼 접촉하기 쉬운 분은 없다. 지금도 주간 3회씩 「바티깐」 도서관장으로서 외래객을 회견하고 있다. 그의 답변은 항상 명료직재한 것이었다. 한 가지 분명치 않은 것이 있다면 그의 사용어일 것이다. 그는 한 시간 동안에도 10여 종의 말을 뒤섞어서 쓰고 있다. ㅈ럼은 신부시절부터 중동의 「셀」언어들을 자유로히 구사하고 있었다.
비오 11세는 그 지방을 순회방문케 했었고 52세에는 추기경에 임명 받았으며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비이태리인 추기경이기도 했다.
▲말틴.오코너 추기경
공의회 13준비기구에 참여한 유일한 미국 출신 대주교이다. 그가 담당한 신문, 라디오 텔레비 및 영화에 관한 문제는 이번 공의회의 특색이며 또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문제에 속한다. 준비된 2천장의 방대한 문제 등을 간략히 설명할 그의 책임은 중대했다. 63세의 대주교는 「로마」에 있는 북미 신학교장으로, 사실주 「바티깐」 미국대사의 임무를 수행해왔다고 한다. 그의 위치는 미국의 국위(國威)와 같이 중대해지기도 했다.
▲그레고리오.베드루XA.아가지아니안 추기경.
아시아, 아프리카 문제가 공의회에서 중대한 자리를 차지했다면, 그 열쇠는 아가지아니안 추기경 손에 있었다. 공의회에 보고된 전교지방의 일들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는 성청 포교성성장관이다. 그래서 「붉은 옷의 교황」이라 불리우고 있다. 아가지아니안 추기경 역시 이태리 태생이 아닌 소수의 추기경들에 속한다. 1958년 이미 차기 교황의 물망이 있었다. 그는 「스탈린」과 같은 지방인 「소비엩」 남부 출생이며 거기서 성장했다. 그의 모친과 매씨는 아직 철의 장막 안에 있고 소식조차 끊어졌다. 그는 11세부터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다. 성 비오10세는 소년시절부터 그의 장래를 촉망하고 고위성직자를 목표로 한 교육을 받게했다. 1937년 42세에 「아르메니아」 총주교에 임명되었다. 총주교로서 가장 젊은 나이었다.
그는 장문객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주교들 평신자의 등급도 없다. 추기경 연세도 68세는 아직 젊은 나이인 것이다.
▲발레리오.발레리 추기경
1백50만 전세계 수도자들을 대표한 도덕 영성 및 물질적인 제반 문제의 그의 발언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오래도록 율수성성(聿修聖省) 장관이었다. 발레리 추기경은 72년 전 중세기부터 유명한 「산따·피오라」에서 탄생했다. 이 고장은 교황령(敎皇領)이 현대 통일 이태리에 흡수당하기 전 그러니까 1870년 전 성청의 속령이었고 동 추기경은 이곳서 탄생했다. 이곳 풍습은 사제지망자를 「로마」로 보냈었다. 그는 서품되자 곧 국무성 근무를 명받았다. 가장 젊은 그에게 외교관 근무의 특명이 내려 「빠리」를 비롯해 성지 및 중동지방을 전전해왔다. 2차 대전 중 괴뢰 빼땅정부의 성청대사를 지내야했던 그의 신고는 상상을 넘는 것이었다.
그 후 「로마」에서 쉬던 중 1953년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그는 항상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는다.
▲벨라도.알프링크 추기경
자그마한 키에 젊음이 넘치고 있는 그는 외래 추기경 중 가장 거대한 존재이다. 화란의 종교 개혁 후 첫 추기경이다. 지금 화란 내의 가톨릭의 부흥은 대단하다. 특히 정치면에서는 가톨릭 각료들이 나서서 그 뒷받침이 되고있다. 이런 복고(復古)의 기운(氣運) 가운데 62세의 알프링크 추기경이 항상 그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이다. 성서학자이기도 한 그는 41세에 화란 주교단장에 선출되면서 더욱 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프로테스탄」 왕실의 존경을 받으면서 수석 주교의 직무를 수행해 왔다.
▲빼리꿀레.페리치 대주교
공의회 사무총장인 젊은 대주교로서 전세계의 주시리에 세기적 과업을 수행해왔다. 오따비아니 추기경처럼 이태리를 떠나보지 못한 분이다. 최근 북이(北伊)를 여행하면서 이렇게 멀리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1963년에는 누구보다 먼저 추기경이 될 것으로 보고 있을 뿐 아니라 교황물망에도 오른 분이다. 공의회 사무처리 등 그의 능력에 기대할 일은 너무나 많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