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10월28일의 「꽁끌라베」는 당시 「베니스」의 총주교 롱깔리 추기경을 교황으로 선거했다.
대대로 위대하셨던 근대 교황 중에서도 너무도 탁월하셨던 비오 12세의 업적을 이어야 할 새 교황은 당시 76세의 고령이셨다.
그 어른은 아마 과도기의 교황일 것이라는 당시의 억측을 완전히 뒤집은 재위 불과 5개년간의 가지가지 업적들.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어 빠빠님의 눈부신 업적을 회고해보자.
1958년 11월4일 대관하시자마자 바로 그달 17일에 23위 추기경을 임명하셨다. 이어서 그 해 12월13일에 23위를, 다음해인 1959년 12월14일에 8위를, 그 이듬해인 1960년 3월28일에 7위를, 1961년 1월16일에 4위를 1962년 3월19일에 10위 추기경을 임명하셨다.
그리하여 선 교황서거 때 정원 70위가 52위로 줄었던 추기원 인원수가 87위로 불었다. 그 어른의 심중에서만 임명하셨고 1960년에 발설하신 3위까지 합하면 88위가 된다.
이 가운데는 교회사상 처음으로 아프리카인 필립핀인 일본인이 추기경으로 등장했다. 이제까지 이태리인의 수가 압도적이던 「로마꾸리아」의 각부 요직의 임명도 국제적으로 배치되어 가톨릭 교회의 가톨리시티가 처음으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1961년 3월21일에는 다수의 아프리카인을 포함한 14위의 전교국 주교를 성베드루 대성전에서 친히 임명하셨다. 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에는 새로 독립된 교계를 설정하셨다.
1961년 4월에는 「로마」 전례 교회사상 처음으로 「비잔틴」 전례를 사용하여 「멜가이트」 예절의 주교 한 분을 친히 축성하시고 1962년 3월19일에 그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셨다.
1962년 3월6일에 시성된 페루의 「물라토」(흑백 혼혈인) 「포레스」의 말징 성인을 포함하여 6위가 시성되었고 미국인 시튼 도모(道母)가 시복되었다.
등극 이래 발표하신 8차의 회칙 중 그리스도교의 원칙을 비그리스도교 세계에까지 널리 미치게 한 「마떼르 엩 마지스뜨라」는 물론 바로 금년에 반포된 「빠쳄 인 떼리스」의 위대한 영향은 적극적으로 반그리스도교적 철막 안에까지 뚫고 들어갔다.
그 어른의 인자하신 자부적(慈父的) 태도에는 4백년간 굳어진 항쟁(프로테스트)의 원한도 풀리기 시작하여 영국 성공회의 주교, 스코트란드의 장로교 지도자를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프로테스탄트」 각 교파의 지도자들이 10명이나 때를 달리하여 그 어른을 뵈오려 「바티깐」을 방문했다. 흐르시초프까지도 자기 사위 부처를 보내 그 어른께 인사를 전했다. 외신보도는 요안 23세가 역대 교황 중 공산 「뿔럭」의 인기를 얻은 최초의 교황이라고 했다.
제1차 바티깐공의회가 중단된지 92년만에 제2차 바티깐공의회를 소집하사 제1차 총회를 마치고 제2차 총회의 속개에 부풀어 가는 희망을 품은 우리에게 너무도 답답한 사정이다.
빠빠님은 1881년 11월25일에 북부 이타리 「베르가모」교구에서 소작인의 아들로 탄생하셨다.
24명의 대가족이 한지붕 아래 한데 거처하는 가난한 생활이었으나 그 어른은 가난하다는 느낌이 없으셨다고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라고 회고하셨다.
풍광이 아름다운 「알프스」산맥 비탈에 있는 빠빠님의 탄생지 「소토일 몬테」 마을에서 11남매 중 70이 넘은 아우 3명과 누이 1명이 농사를 짓고 있다. 그 어른이 「까레솔리」 신학교에 입학하신 것은 11세 때였고 신학에 우등상을 타고 「몬테 산토」의 성모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신 것은 1904년 8월10일이었다. 그 후 그 어른은 10년간 「베르가모」 주교의 비서로 근무하시면서 신학교의 교수직을 겸하셨다.
제1차 대전 때 그 어른은 의무대의 상사로 복무하시다가 소위로 진급되어 종군사제로서 육군병원에 전속되었다. 의무대에서 어느 장교가 『상사 나는 자네에게는 욕을 아니 보일 거야. 나는 그저 사람이다. 그러나 자네는 몬시뇰이 될 것이며, 주교가 될 것이며, 추기경이 될 것이야…』라고 그 어른을 놀렸던 말이 예언이 되고 말았다.
주교비서로 재임 중 조직적 재질이 발견되어 1921년에 베네딕트 15세 교황에게 「로마」로 불리워 「신앙홍포회」(信仰弘布會) 이타리 지부의 조직과 그 전국 위원회의 규정 작성을 맡아 4년간 복무했다.
성하의 외교관 생활은 1925년 불가리아 교황 순찰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해 3월19일에 「아레오폴리스」의 명의대주교로 축성된지 5년 후에 교황사절로 승격되셨다.
1935년 「메셈부리아」의 명의대주교로 승격되어 교황사절로 _이기 및 희랍에 주재하시면서 「꼰스단띠노불」의 라띤전례교구의 교구장을 겸하셨다. 전후 20년간 롱까르리 대주교의 혁혁한 외교업적이 인정되어 1944년 12월에 교황대사로 승진되어 「빠리」에 파견되셨다. 당시 그 어른의 선임자들이 빼땅 원수의 친독(親獨) 정부를 따라 임시 수도 「비씨」에 주재했던 관계로 종전 후 「바티깐」과 프랑스의 관계가 험악했으나 롱까르리 대주교가 부임하시자 프랑스의 태도가 당장에 호전하여 자끄 마리땡 교수를 주 「바티깐」 대사로 파견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빠리」에 재임 중 추기경은 승진되자 외교관례에 따라 그 어른은 당시의 프랑스 대통령 오리올의 손에 「비레따」관을 받으셨다. 프랑스를 떠나실 때 그 어른은 「프랑스 레지옹드놀」 사령관 칭호에 따르는 훈장을 받으셨다.
1953년 1월15일에 「베니스」의 총주교로 임명되시자 3개월 후에 71세의 고령으로 착좌하사 5개년간 당신 산하의 모든 본당을 방문하셨고 30개 본당과 신학교 하나를 신설하셨다. 그 어른은 또 친공적인 중간파와의 합작을 가톨릭 정당에게 세번이나 경고하셨다.
세속에까지 유명한 빠빠님의 「유모아」는 이루 다 해아릴 수 없거니와 오랜 전통에 찌들은 「바티깐」의 번문욕도 민주적인 빠빠님의 천진하신 행동을 제한하지 못했다. 예고 없으신 행차, 호위 없는 거리의 보행, 감옥 방문, 장거리 기차여행, 식사 때의 겸상, 평신도 행렬의 참가 등등 빠빠님의 일화는 두고 두고 되풀어도 끝이 없을 것이다. 6시30분의 아침 미사로부터 밤 10시의 취침까지 책상 위에 산적하는 문서의 결재, 끊임없는 단체의 알현 또는 개인의 면회 전세계의 5억 신자들과 30억 인류의 평화를 위한 노심초사하시는 그 어른은 가끔 꿈속에서 『이 사건은 교황께 가져가야지』라고 중얼거리시다가 잠이 개어 정신이 돌아오면 『그런대 내가 교황이다』라고 혼자말을 하시고 나서 한숨을 쉬시면서 『이 사건은 오 주께 가져가야하겠다』라고 말하신다고 한다.
원래 「로마 꾸리아」의 고관이셨고 다년간 외교관이셨던 빠빠님은 등극하시자 『나를 무슨 고관이나 외교관으로는 알지 말라. 나는 목자다』라는 뜻을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