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주 예수그리스도 「울리와」산 위에 종도들을 모아놓고 승천하시기 앞서 『가르쳐 세(洗)를 주되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인하여 하라』고 분부하셨읍니다. 종도들은 저들의 지혜로서는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도리를 만민에게 가서 가르치라는 명을 받았으니 난처했겠읍니다. 삼위일체 도리는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모순이 되는게 아니고 알기 어렵다 해서 오류가 아닙니다. 태양은 우리가 쳐다보기를 허락지 않지만 우리들로 하여금 딴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이와같이 삼위일체 도리도 우리 지혜를 초월해있지만 우리 지혜로 하여금 우주만물의 사정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니 종도들이 삼위일체 도리를 가르친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문화가 발달되고 건전한 사상이 일어나게 된 반면에 오류·부패가 살아진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지상에 건전한 사상과 진정한 문화를 이룩했을 뿐 아니라 우리 영신(靈神) 생활의 원천으로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를 양육하고 완성하여 영생에 도달하게 합니다. 우리가 영생에 도달한다는 것은 삼위일체에 참여한다는 것이니 그는 우리의 천당입니다.
인간은 천주와 닮았으니 천주의 생명 생활이 인간의 지혜와 의지 속에 나타난다고 짐작할 수 있읍니다. 천주께서는 영원히 생각하시고 영원토록 사랑하십니다. 그러한 생각의 대상이 있기는 하나 무한한 지혜의 대상이 될만한 대상은 천주 당신 자신 이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주께서는 자기 자신을 영원한 지혜로 생각하며 알고 계십니다. 즉 천주는 당신의 완전한 관념을 갖고 계신 것입니다. 인식할 때에 사상이란 것이 생깁니다. 이 사상이 발음이란 외형(外形)을 통해 표현된 것이 말씀(=말)입니다. 이 말씀은 독립된 존재로서는 불완전하지마는 우리와 대립상태에서 있게 됩니다. 성 요왕복음 첫 귀절에 『버릇함에 말씀이 계시다』하였읍니다. 천주의 인식에는 시초도 종말도 없다는 뜻입니다. 『또 천주께서 계시니라』 인식하는 천주 성부와 성자는 별다른 것이지만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곧 천주시리라』 인간처럼 인식할 때에 대상을 그저 머리에 추상적 사상으로 박아 놓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니 성자이신 말씀은 천주 성부와 더부러 완전한 신성(神性)을 갖추신 이요 영원토록 성부로부터 탄생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원조(元祖)가 카인을 낳을 때에 아담이 그의 처 에와를 「인식」(라띤 원어)하셨다 함과 마찬가지로 천주 성부 자신을 완전 무결하게 인식하심으로써 만선만덕(萬善萬德)을 갖추신 성자를 낳으신 것입니다.
사람은 선(善)을 사랑하기 마련이니 악(惡)이 클쑤록 받는 미움도 많습니다. 천주 성부는 손톱만큼도 허물이 없는 성자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성자께서는 또다시 지성껏 성부께 갚아 드리니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무한한 사랑이 발해지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곧 천주 성신입니다. 성신의 발생은 천주 의지의 생활 그 자체입니다. 천주의 자기 인식과 자애(自愛) 천주의 내적 생명(內的 生命)의 대립관계가 우리들이 말하는 삼위일체입니다. 까다로운 삼위일체 도리를 천주께서 밝혀 주신 동기는 사랑에 있고 목적도 사랑에 있읍니다.
천주께서 인류에게 여러 가지로 도리를 가르쳐 주셨읍니다. 나중에는 친아들 오 주 예수를 보내어 직접 가르치게 하셨읍니다. 즉 천주 제2위로 하여금 인간성을 취하게 하사 우리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도리를 가르쳐 주셨으니 우리를 대우함에 지극하셨고, 가르침에 초성은혜(超性恩惠)와 그 생명에 요긴한 모든 도리를 아끼지 않으시고 마침내 삼위일체까지 밝혀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후는 나 너희를 종이라 일컫지 않으리니 대저 종은 그 상전이 하는 바를 아지 못함이요 나 너희를 벗이라 일컫노니 대저 내가 내 성부께 들은 바 모든 것을 너희에게 말하였음이므로니라』고 그리스도께서 증언하셨읍니다.
이 도리를 밝히신 목적도 사랑이었으니 우리는 삼위일체를 앎으로 천주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한층 더 사랑하게 됩니다. 천주 성부의 창조, 성자의 구속(救贖), 성신의 성화(聖化) 사업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천주를 더 깊이 사랑해야 함을 알게되고, 『성부여! 너 나를 사랑하고 또 나 너를 사랑함과 같이 저희들이 서로 사랑하고, 저희들로 하여금 하나이 되어 마치 성부 내게 계시고 내가 성부께 있음같이 저희들이 또한 일합하여 있게 하소서』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한 번 듣기만 하여도 이웃을 사랑해야 할 것을 알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배우는 이의 기쁨은 애써 찾던 진리를 얻음에 있으니 침식을 잊고 연구에 몰두합니다. 예술가도 마찬가지로 이상(理想)의 미(美)를 얻을 때까지 만족하지 않고 쉬지 않습니다. 거기에 그네들의 즐거움이 있고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후(死後)의 우리 즐거움과 생명도 이와 비슷할 것이니 지혜로 영원한 진리를 찾고 의지로 무한한 사랑을 얻도록 노력해야 하겠읍니다. 영원한 진리와 무한한 사랑은 천주 자신이요. 그 내적(內的) 생명이요 삼위일체 속의 생활이니 우리들의 천당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삼위일체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盧景三 神父(곤벤뚜알 성 프란치스꼬회 대구 범어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