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 23世(세)와 再一致(재일치)
敎會一致는 간절한 소망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
佛敎·神道도 찾아들어
발행일1963-06-09 [제378호, 3면]
요안 23세 성하를 교회일치의 교황으로 불러왔다. 재위시 수많은 그리고 각종파의 비(非)가톨릭교회 인사들이 「바티깐」을 찾아 그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그 중에는 바티깐공의회에 참관대의원으로 참석한 39명의 「옵서버」들 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알현한 분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교황을 방문한 그들은 「프로테스탄」 또는 「올소독스」만이 아니라 유대교, 모스렘 및 불교와 일본의 신도(神道) 등 실로 광범위한 비가톨릭의 저명한 인사들이었다.
요안 성하께서 피선(被選)되었을 때 「베니스」의 「라비」감독 레오네.레오니 교수가 제1착으로 달려와서 유데교 단체를 대표한 교황등극 인사를 드렸다. 「베니스」는 요안 23세께서 5년간 총주교로 있던 곳이었다.
1959년 3월18일 제2차 바티깐공의회 준비활동이 한창이던 때에도 희랍 북남미 대교구장으로 선출된 이아코보스 대주교의 교황 방문이 있었다. 그 후 3개월 지나 영국 성공회 도날드.리아감독의 성청방문이 있었다.
이아코보스 희랍정교대주교의 「로마」교황방문은 실로 350년 이래 처음된 일이었다. 영국 성공회 리아 감독은 1926년 성공회 내에 창립된 「로마」 성좌(聖座)와의 연결을 회복하자는 일치운동의 의장이다. 그의 성청 방문은 과연 그 단체를 대표한 공식 방문은 아니지만 평소 그가 존경한 그 인격에 접해보자는 것이 목적이었음을 밝혔다. 그 당시 그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즉 교황은 성좌에 앉아서 이렇게 자기를 끌어 단길 수 있는 매력 있는 분이었다고.
1962년 5월 요안 성하는 또 다른 희랍교회 고위성직자를 접견했다. 「볼로스」의 다마스키노스 수도좌 주교가 약30분간 요안성하께 알현하고 그는 감격찬 어조로 참으로 우호적이요 우리의 갈 길을 명시하여 주었다고 했었다.
1960년 12월2일 이날은 역사상에 길이 남을 것이다. 영국 성공회 「칸타베리」 대주교 지오프레.프란시스.핏셔 박사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 교황을 방문했다.
그 후 5개월 후 영국의 에리사베스 영왕이 그 의식도 찬란히 갖춘 가운데 요안 성하를 방문한 것이다. 영국 여왕은 곧 영국 교회의 수장(首長)인 것이다. 여왕은 역사상 교황을 방문한 세번째 영국왕이며 38년만에 처음된 경사이었다.
요안성하를 방문한 영국 성공회 지도자 가운데는 「월싱감」의 죤.콜린.스테픈손 목사같은 분도 있다. 그는 핏셔박사의 후임자인 람씨박사의 개인 특사의 자격으로 성청을 예방했었다.
1962년 4월 영국 성공회 「사우스와크」 주교 머빈.스톡크우드 박사의 교황 방문이 있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교황은 진정으로 다른 신앙간의 우호를 갈망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그 인격에 최대의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같은해 6월 남아 「케프다운」의 불란크주교가 알현했을 때는 그곳의 인종분규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스콧트란드의 칼빈교회 지도자가 교황 방문을 하게 된 것은 이 또한 특기할만한 일이다. 그는 「스콧트」교회 총회 온건파 지도자인 73세의 아지발드.크리이박사이다. 교황과의 회담 내용은 주로 그리스도교 일치에 관한 것이었음을 밝혔다.
요안 성하께 최근 알현한 「프로테스탄」 지도자는 영국 감리교 총회의장 레슬리.다비슨 목사였다. 그는 교황의 인상을 완전히 성인의 인품을 구유할 분이라고 했으며 그는 교회 일치를 충심으로 바라보며 그 기구를 그치지 않는 분이라고 평했다. 『그를 본받자』고 맺었다.
미국의 교회 인사로서는 2명의 성공회 인사 감리교, 남침례교 및 흑인교회 지도자들이 있다.
미국 성공회 아서.리텐베가 감독은 1961년 11월 요안 23세를 방문하여 미국의 「프로테스탄」 교회로서는 첫번 기록을 만들었다. 그는 사적인 방문이었음을 전제하고 그러나 교회 일치의 밝은 전망을 얻었다고 했었다.
뉴욕의 알버트 J.듀봐 감독이 미국 교회 통합연맹 대표로 요안 성하를 공식방문한 것은 1962년 6월이었다. 「필라델피아」의 프레드.콜손감독은 세계 감리교회의 의장으로 교황방문의 인상을 가장 많이 언급한 분이다. 그는 제2차 바티깐 공의회 첫 회기에 참관대의원으로 참관했으며 작년 10월 1시간 이상의 개인 알현을 했었다. 콜손 박사는 또 요안 성하의 인상을 그리듯 말했었다. 『그는 참 누구나 친근할 수 있는 분이었다. 나는 가끔 교황의 인상을 말하라는 질문을 받지만 교황이 나의 팔을 탁치길래 나도 그의 팔을 잡아 흔들고 또 마주잡고 웃었다』고 했다.
전 남침례교회의 의장인 부르크.헤이스 목사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형제들이다』고 한 교황의 말씀을 받아 위대한 교황의 형제된 것은 위대한 특권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요안 성하의 인상을 죽도록 잊지 못한다고 그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프로테스탄」 「올소독스」 및 유데교 지도자 등이 요안 성하를 방문한 그 의의를 다 쓰지 못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의 위대한 인격을 말하고 있지만 이 모든 개척적인 활동이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성과와 더불어 길이 빛날 것이다.
1962년 7월 일본의 저명한 신관(神官) 마즈바라씨가 그 일가족과 요안 성하를 알현한 것은 또한 특기할 일이다. 그 후도 28명의 일본 불교 승려들의 방문이 있었으며 그들은 『불교도 가톨릭도 같이 신(神)을 섬기며 인류의 평화와 선(善)을 위해 일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RNS 特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