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기까지 (1) 落照(낙조) ①
발행일1962-11-11 [제350호, 4면]
저녁 노을이 바다 저쪽에 아름답기 그림과 같다. 바닷가에는 벌써 조개줍는 아낙네들이 그득히 보인다. 붉은빛 웃옷이 마치 꽃송이 마냥 고와 보였다. 수련(水蓮)이는 아까부터 서창(西窓) 앞에 의자를 끌어놓고 오드만이 앉아있다.
조개를 사라나간 진영(珍英)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오렌지」빛 저녁노을에 넋을 잃고 앉았나보다.
『아-이 참 곱기도 하다』
가는 한숨까지 쉬게 되었다.
『이애가 무엇할가?』
조개를 사라간다고 나간지가 벌써 한참인데 진영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옆방에서는 홍창식(洪昌植)이가 혼자서 맥주를 들이키는지 가끔 맥주 병마개 빼는 소리가 들린다. 해가 저무러가기 시작하자 수련이는 차차 불안해졌다.
모처럼 하루 노는 틈을 타서 인천(仁川) 송도(松島)까지 온 것이 홍창식이를 만난 것이 깨림한 것이다. 서울서 기차를 탈 때 즐겁게만 생각했던 것이 이제는 아주 딴판이 돼버린 까닭이리라. 그것도 미리 눈치래두 채었더면 꾀를 피고 오지나 않을 것을 진영이가 하도 능청을 부리는 통에 까맣게 모르고 따라온 것이다.
『얘 수련아 우리 오늘 인천 놀러 갈까?』
아침잠이 깨자마자 진영이가 달려들었다.
『인천- 송도-?』
『우리야 뭐, 대천(大川)이나 만리포(萬里浦)까지 갈 수 있어? 그러니 가까운 인천 송도라두 가서 하루 놀구와 응?』
『돈이 얼마나 들지?』
수련이는 돈걱정이 앞섰다.
『얼마긴… 머 차삯하구 점심값이면 고작이래두』
『점심야 뭐 싸가지구 가면 되잖아』
『이애 그 구질구질한 소리 좀 그만해. …점심은 내가 한턱 써도 좋으니 어서 나서…』
『넌, 미스터 김이있는데… 왜 나더러 가재니』
『미스터 김은 잔소리가 많아 탈이래두. 오늘은 그놈의 잔소리 좀 듣지 않고 속편이 놀아볼래』
이래서 수련이는 진영이에게 끌리다 시피 인천 송도까지 온 것이다.
송도에 도착하자마자 구정물 같은 해수욕장에서 나마 잠시 몸을 축이고 곧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애 수련아 이왕이면 송도 「호텔」에 가서 사먹자 응』
『호텔은 비싸지 않아』
『글쎄 안비싸 요전번 손님들 허구 왔을때 보니까 음식도 잘하고 값도 싸더라. 자! 어서 일어서… 등셍이 하나만 넘으면 바다가 보이는 푸른 언덕에 하-얗게 있는 양관(洋館) 야 참 멋져』
수련이는 마치 진영이에게 끌려가듯이 따라 일어섰다. 수련이가 진영이에게 무조건 끌려 다니기는 이번뿐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진영이만 만나면 두말 못하고 진영이 하자는 대로다.
수련이는 이것을 체격의 차이에서 생기는 열세(劣勢)라고 생각했다. 몸집 크고 능청맞은 진영이는 도무지 대항할 수 없다. 언제나 지고만다. 그것도 결국은 수련이가 진영이를 믿고 따르려는 심정이 있기 때문이겠지만 오늘 같은 날은 몹시 난처했다. 송도호텔 언덕을 올라서자 낯익은 사나이가 「캬메라」를 메고 서성거렸다. 진영이는 그 사나이를 보자마자 달려갔다.
『미스터 홍! 웬일이셔요?』
『야… 미스 윤!』
수련이는 눈이 둥그래졌다. 미스터 홍이라고 불리는 사나이는 수련이도 여러번 만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회사 전무라는 홍창식의 명함을 받은 일도 있었다.
『이애 수련아 홍전무님 너 모르니』
『모르실리가 있나』
홍창식은 실력 이상의 호탕한 소리를 쳤다.
『미스 김! 안녕하십니까』
홍창식은 수련의 곁으로 다가왔다.
『웬 일이셔요』
수련이는 이말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웬 일이라니 모처럼 휴일이기 나도 놀러왔죠』
『아-니 홍전무님은 그 흔한 색시를 다 제쳐놓고 겨우 「카메라」만 메구 혼자셔요』
『…난 늘 이런걸… 말하자면 고독을 즐기는 거지!』
『고독을 즐길줄 아신다면- 다시 뵈야 하겠는데?』
『다시 보다니…』
『취미가 너무 고상하시지 뭐에요』
『자… 어쨌든 잘 됐어요. 「호텔」에 가서 점심이나 같이 먹구 사진이나 찍으십시다. 짐은 순 고물이지만 바다에 해가 떨어질 때만큼은 참 볼만하죠』
『이애 수련아… 우리 홍전무님 신세 좀 지자꾸나 응…?』
『난 싫어… 우리끼리 놀러오지 않았어』
『온 애두… 안골 손님이신데… 어떠냐! 그래선 못써, 자…어서 가볍게 따라나서』
여기서 수련이는 또한번 진영에게 끌려들었다. 똑 선머슴 같이 나대는 진영이를 수련이는 은근히 밉살스럽게 여기면서도 진영이 곁을 떠나면 무언가 허전했다. 남편없이 외로이 지내는 까닭일지도 모른다. 함부로 몸을 내돌리는 여러 동무들 틈에서 혼자나마 마음부칠 터전삼아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수련이는 결국 진영이에게 끌려서 송도호텔로 들어갔다.
『자… 우선 목욕 좀 하세요. 그동안 나는 뒷산에 가서 약수 좀 마시구 올테니…』
홍창식은 힐끔 힐끔 수련의 눈치를 보며 뒷산으로 올라갔다. 수련이는 어쩐지 자기가 속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진영이와 홍창식이는 이미 미리 짜놓고 자기를 이곳으로 끌어들인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설마하니 무슨 위기(危機)가 닥쳐올리는 없지만 공연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수련아… 목욕할까』
『난 싫어-』
『애두, 바닷물에 젖은 몸을 그냥두면 피부부려, 어서 같이 씻어, 어서 따라와!』
진영이는 여러번 와보았는지 성큼 목욕탕을 찾아갔다.
수련이는 조마조마한 가슴을 안고 목욕탕으로 따라 들어갔다. 진영이는 무엇이 즐거운지 찬물을 퍼서 어깨에서부터 내리쏟으며 『어이 시원해 너무 이리 가까이 와?』 소리를 쳤다. 수련이는 진영이가 끼얹는 물을 같이 맞으며 부지런히 바닷물에서 묻어온 소금기를 씻어버리기에 바빴다. 바루 이때다. 누가 문을 와락 열었다. 우 여인은 거의 본능적으로 쪼그리고 돌아섰다.
『아! 실례했읍니다.』
문을 탁 닫고 가는 사람은 홍창식이었다.
『머- 저래! 별꼴다봐』
수련이는 혀끝을 찼다.
『벌써 취했나?…』
진영이가 대꾸를 했다.
『너 홍씨허구 미리 짜구서 나를 끌고온건 아니냐?』
『이애 기분 나쁘다 내가 머 연애 「뿌로가」인줄 아냐. 머 그런 소리를 해!』
『글쎄말야』
수련이는 기가 질려 입을 벌리지 못했다.
『너는 특별이지만… 다른 애들은 머 손님이 목욕탕 문좀 여는 것… 놀라기나 해?』
진영이는 넌지시 한마디 했다.
『그럼 내가 바보란 말야?』
『누가 바보래 그렇단 말이지…』
『아-이 배고파 어서 나가 밥이나 먹자』
서련은 홍창식이가 어느틈에서 엿보구 있는 것 같아서 얼른 나가고 싶었다. 식당에는 벌써 식탁이 준비돼 있다. 수련은 하는 수 없이 홍창식과 같이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홍창식은 밥은 거들떠보지두 않고 맥주만 마셨다. 식사가 끝나고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더니 어느틈에 진영이는 뜰에 나가있었다.
『이애 수련아!』
『응!』
『내 얼른 가서 조개 사가지구 올께』
『나두 같이가』
『얼른 다녀올께 창문 열고 바다구경이나 허구 있어』
『글쎄 나두 데리구가』
『글쎄 그냥 게 있어』
『늦으면 시러! 나두 갈래…』
수련이는 벌떡 일어나 쫓아가려 했으나 벌써 진영이의 발자국 소리는 멀어져갔다.
『아 이 애두 뭐 그래…』
수련이는 하는 수 없이 주저 앉았다. 해가 질 무렵 창밖으로 보이는 인천바다는 아름다웠다. 해가 바다 저편으로 잠기려는 고비였다.
햇빛을 받은 떼구름이 모두 곱게 물들어 아름답기 한이 없다. 수련은 창앞으로 의자를 끌어다 놓고 바다 저편을 넋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미스 김! 맥주 한잔 안하시겠오』
홀에서 혼자 남아, 맥주를 마시던 홍창식이가 소리를 쳣다.
『어서 혼자 많이 잡수셔요. 난 술 못먹습니단3
『아니 「빠」에 나가는 색시가 술을 못먹다니…』
『정말 못먹어요』
『그럼 와서 술이나 좀 따라 주구료』
수련이는 화가나서 다시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두 체면이 있는지 홍창식은 다시는 아무말 없이 혼자서 술만 마시고 있었다.
넓은 홀에는 홍창식이 혼자서 술상을 보구 옆방에서는 수련이 혼자서 바다쪽만 바라보고 있다. 호텔은 조용하기 잠든것 같다. 갑작스러이 몸이 오싹해졌다. 가슴이 설레는게 꼭 무슨 불길한 일이 일어날 직전(即前) 같은 생각이다.
수련이는 얼른 「핸드빽」을 열고 조그마한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 속에는 묵주가 들어 있었다. 이 묵주는 요번전 옆집 아주머니가 가진 것이 어쩑비 부러워서 충무로를 지나다가 무심코 산 것이다.
물론 수련이는 교리도 모르는 외인이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묵주도 방사도 받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묵주를 꼭 쥐고 빌고 싶으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