紀念碑(기념비)로 길이 빛날 요안 聖下(성하)의 回勅(회칙)들
발행일1963-06-09 [제378호, 4면]
사목하고 교훈하는 교황으로서의 요안23세 교황의 지위는 그의 기념비적 사회 회칙 「마뗄·엩·마지스뜨라」와 그보다 더 역사적인 「빠쳄·인·떼리스」로써 뚜렷이 나타났다.
「마뗄·엩·마지스뜨라」는 현대에서 최초의 위대한 사회회칙인 레오14세 교황의 「레룸·노바룸」의 70주년 5월15일부로 기록되었으나 1961년 7월14일에 발표되었다.
2만자를 헤아리는 동 회칙은 사회적 및 경제적 생활에 있어 교회의 역할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언한 도처의 가톨릭 사회학자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이 기념비적 문헌에서 교황은 사회화 후진국의 요구(교황에 의하면 부강국에 대한 정신적으로 불가피한 의뢰) 농촌의 궁핍한 실정 세계 인구 증가의 압력과 같은 문제들에 초기 사회회칙의 응용을 현대화했다.
국내적인 범위로 말하면 공동선은 최대다수의 노동자의 취업을 요구한다고 교황은 선언하고 노동자들 가운데서도 특권 계급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가격 및 임금 사이의 균형 유지를 호소하고 최대 다수에게 용이하게 입수될 물건을 만들고 써비스를 할 필요를 강조했다.
경제의 각종 분야 즉 농업·공업·써비스 사이에 있는 불균등의 제거 또는 적어도 그 제한을 경제적 팽창 및 사회 써비스 사이에 특히 공권의 행동을 통해 정당한 균형의 조성을 그리고 과학과 기술의 진보에 대한 생산방법의 최선적으로 가능한 조절을 교황은 촉구했다.
이 모든 촉구에 그는 보다 인간적인 생활방법을 마련하는 이익을 현 세대에만이 아니라 장래 시대에도 유용하게 하라는 권고를 보탰다.
「만뗄·엩·마지스뜨라」의 가장 주목할 특징은 비가톨릭 세계에서 일으킨 비상한 반응이었다. 가톨릭 교회 밖에서 보다 지속되는 관심을 자극한 교회회칙은 그때까지 하나도 없었다. 아메리카의 유명한 「프로테스탄」 신학자 레인홀드.니이버이 박사는 『가톨릭 교회가 사회적 입법에 있어 아메리카를 앞선 것을 감사한다』라고 선언했다. 미국의 종교적 편집인들과 기자들 가운데서 투표한 결과 동 회칙을 1961년 10종의 최고 종교 서적목록에 넣었다.
오히려 더 주목할 일은 정치적 및 경제적 세속 사회에 관한 『그리스도교와 사회발전』이라는 보다 설명적인 제목으로 얼른 알려진 「마뗄·엩·마지스뜨라」의 충격이었다.
동 문헌은 유엔의 경제 및 사회 위원회의 「제네바」 총회에서 세계의 사회 상태에 관한 토론 중에 여러번 인용되었다.
구라파 경제 공동체에 가맹한 6개국의 국회의원 회의는 경제적 후진국과 선진국 사이의 관계를 다룬 동 회칙의 부분을 배부하기로 표결했다.
동 회칙의 소책자는 영국 국회의 전원과 모든 영국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배부되었다. 동 회칙은 회회교 세계의 많은 지방에도 그 종적을 남기고 모든 대륙의 신문에 보도되고 해설되었다. 가톨릭 세계에 준 동 회칙의 충격은 그 현상이 없는 것이 없다.
동 회칙의 소책자는 교황이 반포한 어느 다른 문헌의 경우에서 알려지지 아니한 범위로 가톨릭 집단들 사이에 배부되었다.
요안 교황이 만일 「마뗄·엩·마지스뜨라」로서 새 바람을 불게했다면 「빠쳄·인·떼리스」로서는 진정한 선풍을 일으켰다. 현대의 교회 역사상 어느 회칙도 그렇게 직각적이며 광범한 반응을 일으킨 것은 없다. 오히려 더욱 주목할 일은 공산주의 세계에서까지 똑같이 찬성하는 호응이었다. 그러나 이 관계에 있어 「바티깐」 방송국은 핵무기로 전멸되는 데서 세계를 구하기 위해 협상하라는 동 회칙의 호소를 강조하면서도 공산주의자들은 「빠쳄인떼리스」의 핵심이 되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 것을 무시했다고 민첩하게 지적했다.
동 회칙에서 교황은 『천주께서 정하신 질서가 의무적으로 준수될 때만』 평화가 확립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의 권리 이성 인간성』은 군비 경쟁이 종식되기를 각국에서 축적된 무기가 『관계 국가에서 평등하게 동시에』 축소되기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핵무기의 금지를 촉구했다. 교황은 전 세계적 범위의 문제들은 『대폭의 권능과 구성과 그와 동등한 비례의 방법이 부여된』 공권의 노력으로써만 적당히 해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것은 뚜렷한 유엔 강화의 호소다.
동 회칙의 다른 욧점은 아무런 정당성도 완전히 없는 만큼 인종 차별의 통렬한 배척과 종교 자유의 솔직한 수호다. 교황은 『모든 인간 존재는 똑바른 양심의 명령에 따라 천주를 공경하는 자유를 가졌으니 공적으로 사적으로 천주를 예배하는 권리를 가졌다』라고 말했다.
세계 각국에서 「프로테스탄」 및 유대교의 지도자들 그리고 기타 종교의 대변인들은 동 회칙을 비상한 관찰과 의의가 있는 문헌으로 환영하는데 서로 타투었다. 미국 및 구라파에서 각 신문은 한 가지로 찬양했다.
미국의 국회의원들 및 영국의 국회의원들은 동 회칙이 국제긴장의 완하를 지향한 주요한 공헌이라고 말했고 유엔의 사무총장 우.탄트는 요안 교황의 『위대한 지혜와 선견과 용기』를 찬양하면서 『핵 시대의 세계 평화에 대하여 자기 사상을 보냄에 있어 그는 실로 인류의 생존을 위해 호소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동 회칙을 공식으로 찬양하여 『인간의 존엄 및 평화와 자유에 대한 권리의 재주장』에 대해 『보다 책임 있는 나라는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역사적인 「마뗄·엩·마지스뜨라」 및 「빠쳄·인·떼리스」 외에 요안 교황은 재위 4년반동안에 5종의 다른 회칙을 발표했다. 1959년 6월29일에 반포한 「아드·뻬뜨리·까떼르람」(베드루의 좌에게)이라는 최초의 회칙에서 그는 『천주는 인간을 원수로서가 아니라 형제로서 창조하셨음』과 『만일 불화의 불이 이 세상에 다시 붙으면 소름이 끼치는 파괴와 폐허 이외에는 아무 것도 전 인류를 기다리는 것이 없음』을 명심하라고 전 세계의 지도자들에게 엄숙히 권고했다.
그는 공산국가들 특히 중공의 교회 박해를 말하고, 전세계의 실업자 증가를 경고하고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에 올바르고 홤고한 관계를 호소하고 「마스콤」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고, 도처에서 사회악이 가톨릭 「악숀」에게 던지는 도전을 강조했다.
이 모든 논제는 그리스도교도의 일치와 마찬가지로 단독 또는 단체 알현에서 교황은 여러번 되풀어 말했다.
성 비안네(저 유명한 아르소의 본당 신부)의 서거 백주년을 기념하는 1959년에 반포한 제2의 회칙 「사체르도티 노스트리 푸리모르디아」에서 교황은 저 겸손한 프랑스인 본당 신부를 현대 세계의 사제들을 위한 모범이라고 찬양했다.
그와 동시에 보다 많은 사제성소의 큰 필요성을 말하고 『자기 자녀를 교회의 봉사에 기쁨과 감사로 바치라』로 그리스도교 강정을 격려했다.
같은 해에 요안 교황은 2종의 다른 회칙을 반포했다. 「그라따 레꼬르따시오」(감사한 기억)에서 그는 세계의 국가 원수들이 그들의 이견(異見)을 낙착시키도록 10월동안 특별한 신심으로 묵주 신공을 하라고 가톨릭 신자들에게 호소했다.
다른 하나는 전교사업에 관한 베네딕트 15세 교황의 회칙의 40주년 기념으로 반포한 「뿌린쳅스 빠스또룸」(목자들의 왕)이었다.
이 회칙에서 그는 벨기영 콩고와 루안다 우룬디에 8처의 새 대교구 및 29처의 교구 창설을 예고했다. 그는 또한 아프리카및 아시아의 전교 지역에서 공산주의 위험을 경고하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에 휩쓸려 넘어가지 말라고 그곳의 신자들들에게 경고했다. 그 다음에 「마떼르 엩 마지스뜨라」가 나왔다. 그것은 대 레오_인 서거 1050주년 기념인 1961년 12월9일에 반포된 「에데르나 데이 사삐엔시아」(천주의 영원한 지혜)를 뒤따른 것이었다. 이 문헌에서 교황은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탄의 파괴적 폭력의 공격을 저항하는 힘을 일치 안에 발견할 것이다』라고 선언하면서 그리스도교도의 일치에 대한 그의 호소를 갱신했다.
1962년 7월1일에 발표된 요안 교황의 제7회칙 「뻬닌맨시움아제레」(보속하기)는 제2차 바티깐공의회와 직접 연결된 것이었다. 교회의 주교들의 위대한 회답을 위한 준비로 보속을 실천하라고 신자들에게 촉구한 것은 요안 교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