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映畵
영화는 오늘날 가장 통속적인 여가 이용의 하나이다. 오늘 시청각 문화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영화는 현대 문명의 큰 사실 중 하나이다.
문학의 이러한 새 형식은 많은 이익을 갖다준다. 그러나 영화제작자가 좋은 것도 나쁜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것을 판단하고 선택하는 일은 우리에게 달렸다. 우리는 아무것이라도 본다고 하는 수동적인 관람자가 되어서는 아니된다.
문학에도 교양이 있는 것처럼 영화에도 교양이 있다. 한가지 「필림」의 윤리적 안내(고우테이쓴)는 문제의 관점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지력과 마음과 예술적 감각과 동시에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좋지 못한 영화를 오래도록 보는 것은 분명히 정신을 망그뜨리고 윤리적 판단력을 견고히 하는데 조금도 공헌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이 영화 교양은 지성들과 예술가들에게만 보류되어있지 않다. 가톨릭교회는 권위있는 여러나라이 영화관계자를 동원하여 영화 예술의 면에서가 아니고 윤리 도덕면에서 영화안내를 통하여 만인에게 지침을 주고 있다. 교회게시판에도 현재 그 지방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를 안내하고 볼 수 있고 볼 수 없는 것을 제시해주었으면 좋겠다.
영화 「클럽」이 조직되면 좋겠다. 이 구락부가 「필림」을 선택해서 관람자를 초대하고 상영후 그 가치에 대하여 공적으로 토론한다. 이 「클럽」은 고무자(鼓舞者)를 가정하고 그를 양성해야 한다.
대부분의 「필름」이 어른들을위 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십대의 아동들을 위하여 위험이 없지도 않다. 구제 수단은 무엇인가? 아이들이 볼 수 있는 「필림」을 서택하는 것이다. 만일 가능하면 아이들과 같이 가서 관람하고 다음에 그들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 회화가 성공적이면 아이들의 비판력을 기르고 그들과 부모 사이에 효과 있는 접촉의 기회가 될 수 있는 이중의 이익이 될 것이다.
「필림」 앞에 저항하도록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시기상조이다.
서울에서는 TV 「붐」을 일으키고 있고 부산 포항 등지에서도 일본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앞으로 도시에서는 오락의 문제가 매우 변화될 것이다.
「프로그람」이 때로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온 가정을 모을 수 있고 이웃을 초대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좋은 것도 많이 나온다. 예컨데 학적 소식 일반 「뉴스」 「스포츠 뉴스」 등 그러나 주일아침 종교 시간(이것은 오락이 아니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 한가지 매우 중대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무저항이다. 우리가 이 적은 「스크린」 앞에 있을 때 그 화면이 평범하고 혹은 나쁘더라도 또 자러갈 시간이 되더라도 글을 써야하고 책을 읽어야 하더라도 그 앞을 떠날줄 모른다.
항상 『오분만 더보고…』 하지만 그만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결국 시간을 잃어버리게 되고 게으른 습성을 기르게 된다.
TV도 어린이를 위한 것으로 많이 나와야 한다. 아이들이 보와서 불편한 것이 없는 것이 많이 나와야 한다. 연소한 사람들을 위한 내용이 아니면 어머니나 누나가 아이들에게 누워 자러가라고 말하면 좋다. 가정에서 주의할 것은 1, 아이들 마음대로 「샤넬」을 돌리지 말도록 하고 2, 아이들 나이를 생각해서 금하기보다 어떤 「샤넬」을 보라고 할 수 있고 3, 아이들의 눈이 상치 않도록 「스크린」과 일정한 거리를 알려주어야 하고 4, 아이들이 너무 늦게 자지않도록 보살펴야 하고 밤에 구경이 있으면 자러가는 시간과 관람 시간 사이에 몇분간의 휴식 시간을 미리 보아야 한다.
■ 餘暇
해태(懈怠)는 모든 악습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여가는 일과 기도와 마찬가지로 천주께서 원하신 인간 활동이요 그것은 우리를 천주를 향하여 나아가게 한다.
인간의 여가는 천주의 계획 가운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천주께서는 사람에게 노동의 법칙만 주시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에게 안식일을 지내기를 명하셨다. 그것은 천주의 백성의 기본 법률중 하나이다. 그러면 왜 일하기를 끄쳐야 하는가. 성경은 창조의 제6일 후에 쉬겠다고 말한다. 창조의 업적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것만이 천주의 활동이 아니다. 그보다 더 신비로운 것이 있다. 사람은 밭갈고 집짓는 노동자만이 아니요 가정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천주님은 창조주만이 아니시다. 그도 역시 그 안에 생활을 영위하신다. 그 생활이 성부 · 성자 · 성신 사이의 사랑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안다.
성서가 천주께서 창조하시는 행동에서 쉬셨다고 우리에게 말씀할 때 우리의 지혜와 마음을 천주의 이 신비로운 생활의 발견으로 향하게 한다. 인간의 노동은 천주의 창조 사업의 연장이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다. 사람은 노동으로 천주를 닮을 뿐만 아니라 쉼으로도 천주와 비슷한 자 된다. 천주께서 쉬셨으니 인간도 쉬어야 한다. 천주처럼 노동보다 더 높은 활동에 자기를 줄 수 있도록 쉰 것이다.
이 활동은 무엇인가? 분명히 가정생활 여가의 생활이다. 천주께서 세상을 보신 바와 같이 사람도 세상을 본다. 세상은 다만 일하기 위하여만 된 것이 아니고 감탄하기 위하여도 되어있다. 마침내 자연적으로 그 감탄 그 사랑은 창조주에게 향하기 위해 이 세상의 지평선을 넘어야 한다.
엿새동안 일하고 하루 쉬도록 주어진 법이 우리에게 이 생명의 비밀을 드러낸다. 사람은 일하기 위하여만 난 것이 아니라 천주와의 생활에서 사랑하고 감탄하기 위하여도 났다. 생활의 더 높은 부분은 여가를 가정한다.
안식일이 천주께서 준비하신 유일한 여가가 아니다. 일년에 세번 천주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큰 축일 오랫날을 계속하는 쉬는 축일을 조직하셨다. 그것은 모든 백성을 위해 즐거워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과월제, 오순제, 장막제라 불렸다. 각각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였다.
과월제는 에집트에서 해방된 것과, 오순절은 「시내」산에서 주신 법과 장막제에는 사막에서의 생활을 기념하였다. 그 위에 이 축제는 인간 노동의 단계에 해당된다. 과월절에 밀 추수가, 오순제에 새 수획으로 떡을, 장막일에 추수가 끝났다.
그때는 지상에 결실을 주신 천주를 감사하는 순간이었다.
그때는 즐기는 때였다. 이 축일에 아무도 빈 손으로 오지 아니했다. 혼자 즐기지 아니했다. 종교축일과 농사축일이 하나이 되었다. 추수의 기쁨은 감사의 행동으로 꽃피는 인간적 기쁨이다. 그럼 여가 이요에 대해 어떠한 결론을 지을 수 있을까? 거기 관한 성서적 「텍스트」는 왜 사람에게 여가 이용을 원하셨는가를 말해준다.
쉬기위하여 - 노동은 피고을 가져온다. 여가와 노동은 인간 생명이 균형 잡히기 위해 교대되어야 한다. 낮과 밤이 노동과 휴식을 교대하게 한다. 매주(週)는 하루의 여가를 준다. 매년은 큰 축일을 갖다 준다.
자유롭기 위하여 - 노동은 속박을 준다. 그러나 사람은 천주의 아들이다. 여가는 그에게 지상 낙원의 자유를 주기적으로 주어야 한다.
감탄하기 위하여 - 세상은 넓고 아름답다. 그것은 천주의 업적이다. 여가의 덕으로 천주의 아들이 낙원에서와 같이 그를 보고 감탄 할 수 있다.
사랑히기 위하여 - 천주께서 사람에게 가정과 친구를 주셨다. 그에게 여가를 주시면서 사랑하는 시간을 주신다. 자기 아내와 자녀와 가까운 가정뿐 아니라 전 인류의 큰 가정을 사랑하는 시간을 주신다. 여가의 시간은 또한 애덕을 베푸는 시간이다.
기구하기 위하여 - 사람은 살과 피로된 존재만이 아니다. 그는 천주의 아들이다. 그것이 천주와 살 수 있는 그의 위대성이다. 매일의 기구 매주일의 미사 매년의 큰 첨례는 그가 천주와 함께 살 수 있는 특전있는 순간이다.
인간은 천주의 가장 큰 선물을 잘못 쓸 수 있다. 사랑과 지혜 등은 천주의 선물이다. 사람은 해태와 무위에 자기를 던지거나 자유와 방종을 혼돈하면서 노동과 여가사이에 있는 서로 다른 기본적인 법을 파괴하여 여가의 뜻을 그르칠 수 있다. 이러한 지나친 과오가지는 가지 아니하더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여가가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 예컨대 노동을 방해하고 필요한 휴식을 취하기를 방해하며 혹 우리의 마음이 금지된 어떤 오락을 누림으로써. 바오로 종도는 『모든 것은 너희 것이다. 그러나 너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천주의 것이다.』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다. 노동과 여가도. 모든 여가도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육신에게 휴식을 주고 우리의 정신을 수양하고 우리안에 기쁨을 만들자. 이 휴식, 이 수양, 이 기쁨이 마침내 노동과 여가를 우리에게 주신 주님께 올라가도록.